Tuesday, April 10, 2012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성경구절: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 4:15-16)


서당에서 훈장님이 아이들을 가르친다: “자, 너희들 나를 따라 해봐라.” 그리고, 천자문을 읽어 나갑니다. ‘바람 풍(風)’ 자를 하는데, 아무래도 학생들이 자신을 따라서 하는 것같지 않다. 그래서, 훈장님이 다시 한 번 반복한다: “바담 풍風).“ 아이들도 큰 소리로 따라서 합니다: “바담 풍(風).” 훈장님은 “바람 풍(風)”도 제대로 발음할 줄 모르는 학생들을 향하여 화가 난다. 한 아이, 한 아이 시켜보지만, 하나 같이 “바담 풍(風)” 한다. 회초리를 들고 “바람 풍(風)” 자도 제대로 따라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종아리를 때린다. 몇몇 아이들이 참다 못하여 훈장님께 아뢴다: “훈장님이 바담 풍(風), 바담 풍(風) 하셨잖아요?” 훈장님은 비로소 자신의 혀가 짧아서 “바람 풍(風)” 자를 “바담 풍(風)”으로 밖에 발음하지 못하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아이들을 향하여 야단을 칠 때, “이 녀석들아, 나는 ‘바담 풍(風)’ 하더라도, 너희들은 ‘바담(실은 바람) 풍(風)’ 해야지”하며 소리를 지른다. 나는 잘못 발음하더라도, 아이들은 제대로 발음하기를 원하는 것이 학생들을 사랑하는 훈장님의 마음이다.

순자(荀子)의 「권학(勸學)」편에 “청출어람청어람(靑出於藍靑於藍)”이란 말이 있다. “푸른 빛(靑)은 쪽빛(藍)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뜻이다. 이를 줄여서 흔히 “청출어람(靑出於藍)” 또는 출람(出藍)이라고 하는데,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가 스승보다 더 뛰어날 때 쓰는 말이다.

고사(古史)를 보면, ‘공번’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밀’의 스승이었으나, 몇 해 후에는 ‘이밀’의 학문이 ‘공번’을 앞질렀기에 공번은 자진하여 이밀의 제자가 되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함이 진보를 이루는 기본이요, 나는 부족함이 없다고 스스로 여기는 사람은 항상 그 모양으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제자를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스승은 ‘제자가 학문적으로 자기를 추월하여 앞질러 가는 것을 시기(猜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한다.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지만, 교인들 중에 그보다 더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고, 더 기도 많이 하고, 더 주님을 사랑하고, 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신실한 삶을 살아간다고 해서 그 교인을 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할 수만 있으면, 모든 교인들이 그로부터 하나님 말씀을 전해 듣고, 크리스천이 마땅히 살아가야 할 도리에 대해서 배우지만, 그보다 앞서 나아가기를 바란다. 그리할 때, 그러한 교인들은 그의 참 자랑거리가 된다.

자녀들이 자라면서 가정에서는 부모로부터, 학교에서는 스승으로부터 이 사회를 사는데 필요한 것을 배우는데, 부모와 스승--“월급쟁이 스승”의 차이점이 있다. 물론, 진정한 스승은 부모와 같은 마음이요 입장이다. 부모와 진정한 스승은 그 아이가 잘못을 할 때 지적해주고, 때로는 야단도 치며, 심하면 매를 들기도 한다. 그 아이를 지적하고, 야단치고, 때림이 그 아이를 미워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음을 안다. 그 아이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심하게 대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미운 아이에게는 떡 하나를 더 주고, 사랑하는 아이에게는 매를 한 대 더 준다”는 속담도 있지 않는가? 그러나, 월급쟁이 스승이나 삯군 목자는 세상의 학문을,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기는 하지만, 그것을 듣는 학생이, 교인이 어떠하든지 상관이 없다. 따라오면 따라오는 것이고, 말아도 그만이다. 세상의 학문이든, 예수 그리스도이든, 지식의 전달자로서 가르쳤으니 그만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그들이 듣고 따라오면 그들이 잘 되는 것이고, 안 듣고 안 따라오면 그들이 망하는 것이니 내 알 바 아니라는 생각이다. 궂이 그들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해서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육신의 아비는 아니지만 그들을 때로는 얼르고 때로는 야단을 침은 그가 그들의 영의 아비가 되기를 원한 때문이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처음 가르친 것이 바울이고, 할 수만 있으면 그들 모두가 상급이 있는 크리스찬들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씀할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한다.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할 때, 바울의 무엇을 본 받는 자 되라는 것인가?
--그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본 받는 자 되라고 한다.
--그가 이제까지 그의 생에서 중요하다고 여겼었던 모든 세상 것들을 분토(糞土)만도 못한 것으로 여겨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을 알기로 작정한 것을 본받는 자 되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 마음 밭에 받아 열매를 맺되 풍성한 것으로 남기고, 영에 속한 자로서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사모하는 그 마음을 본 받는 자 되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청하여 미련하고 약하고 비천한 자 됨을 본 받는 자 되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수고하고,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는 그 생활모습을 본받는 자 되라고 한다.
-그 위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누지 않고 하나가 되고자 하는 바울의 희생과 사랑의 마음을 본 받으라고 말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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