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pril 10, 2012

‘은혜받았습니다’의 의미

                                                            ‘은혜받았습니다’의 의미


성경구절: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딤후 4:3-4)


어떤 목사님이 자신의 경험을 말씀한다. 이 분이 큰 교회 전도사로 재임하던 중 모처럼 기회를 얻어 주일 저녁예배 설교를 맡게 되었다. 그 전도사님은 천 명이 넘는 교인들 앞에서 설교할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 말씀을 잘 전하기 위하여 열심히 설교준비를 했다. 고린도전서 8장을 갖고 크리스천의 경제윤리를 설교하고자 준비하는데 한 장로님의 얼굴이 자꾸만 설교준비의 길을 막는다. 그 장로님은 자그마치 빌딩 아홉 채를 소유하고 땅도 상당하여 당시 개인소득세 납부 실적이 한국 전체에서 10위안에 드는 분이었다.
그 전도사님은 처음에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제윤리를 말씀 그대로 설교하고 싶었지만 그 장로님이 부담이 되어 결국 우회적인, 변죽을 울리는 설교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속으로 이르기를, 그 장로님이 설교내용의 속뜻을 깨닫고 아홉 채 빌딩과 땅의 얼마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았다.
  설교를 마친 전도사님께 부자 장로님이 다가오며 말을 건넨다. “전도사님, 오늘 설교 참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아니 젊은 전도사님이 어떻게 설교를 그렇게 잘 하십니까?” 하면서 기쁜 낯으로 악수를 청한다. 그러나 기실 그분이 은혜 많이 받았다고 한 것은 전도사님을 통한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기 소유의 일부를 나누어줄 생각이 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설교를 듣고 보니, 장로님의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의 해석으로는 재산을 그대로 갖고 있는다고 해서 크게 죄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전도사님의 설교가 그분의 귀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 많은 재산을 계속 보유해도 좋다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에 은혜로 생각된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삶 가운데 부담으로 생각되는 것에 관해 설교 듣기를 원한다. 가려운 귀를 그대로 두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다. 누가 시원하게 긁어주기를 원한다. 전혀 언급이 없으면 그것을 갖고 사는 것이 계속 부담으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에 관한 설교를 듣고자 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보다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그것이 죄가 아니요, 허물이 아니라는 해석을 듣기 위해서이다.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아는 한 아이가 있다.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시는 것 같은데 야단치지 않으시면 계속 불안한 가운데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것에 관하여 “얘야, 그건 잘한 일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괜찮은 일이야.”라고 하시면 마음이 홀가분하다.
설교를 듣는 사람은 대개 자신이 가책을 받는 부분에 대해서 설교를 듣기 원하지만, 말씀을 통해 지적받기보다는 잘못된 것 같다고 여겨지는 부분에 대해서 괜찮다는 대답 듣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만일 목사님이 괜찮다고 말해 준다면, 설교를 통해 ‘은혜받았다’고 여기게 된다.

이 일에 대해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3-4절에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니라”라고 말씀한다. ‘귀가 가렵다’고 하는 표현은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잘못된 것처럼 여겨지는 부분이 자기 삶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 잘못된 부분을 도려내야 할 터인데, 그러자니 너무 아깝고 잃어버리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해 줄 설교자를 구하되, 그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둔다고 했다. 즉, 직언해 줄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듣기 좋은 소리를 해 줄 사람 두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하루는 부자 청년 관원이 예수님께 찾아왔다(마가 19:16-22; 막 10:17-22). 그 사람이 왜 예수님을 찾아왔겠는가? 그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계명들을 잘 지킨 사람이다. 그러나 그 마음에 여전히 한 가지 부담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에게 재산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그에게 늘 부담거리가 되던 중 영생에 관한 가르침을 전한다고 하는 예수라는 선생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리하여 예수를 만나서 그분의 변호를 듣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가 듣기를 원했던 대답은, “당신에게 재산이 많아도 괜찮습니다. 당신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계명들을 잘 지켜오지 않았습니까? 지금의 권세와 부귀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당신은 지금 이 모양 그대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는 대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참으로 직설적(直說的)이다. 그가 이것만은 피했으면 했던 문제를 적나라하게 지적하신다. 성경은 이것이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으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막 10:21). 그때 부자 청년 관원은 어떻게 했나?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 10:22)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나의 허물을 고치지 않아도 좋다는 말씀을 듣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지 않으신다. 만일 설교자가 ‘그래도 좋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 말씀의 강한 뜻을 변경하여 하와를 미혹한 옛뱀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구하지 않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만 구하는 자가 된다.

사람들의 죄와 허물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는 회개하지 않은--뉘우치고 고치지 않은--죄와 허물을 들추어내지 않고 덮어두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한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는 것이요 기억지 않으시는 것이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