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29, 2012

모든 것의 때

                                                      모든 것의 때


성경구절: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전도서 3:1-8)

요즘 한창 선거의 일로 미국과 한국에서 정치인들이 바쁘다. 그들은 이번이 그들이 원하는 자리에 도전하기에 좋은 때인지 분주하게 계산해 본다. 의욕이나 욕심이 앞서다 보면,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은데도 출사표를 던지는 수가 있다. 


바둑을 두다 보면, 아직 대국의 초반인데도 불구하고 승리의 가망성이 없는 필패(必敗)의 판임을 알 때가 있다. 해서, 그 대국을 포기하기 위하여 돌을 던질 때를 찾으면서 한 수, 두 수 두지만, 어느덧 던질 때를 놓쳐버리고 무의미한 반상 메우기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을 보면, 초읽기에 몰리면서까지 끈기 있게 붙잡고 늘어짐으로 질 것 같은 바둑을 이기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관전자의 눈으로 보기에는 별로 불리한 것 같지 않은데도 40-50 수만에 돌을 던지는 경우도 본다. 그러나, 그가 분명히 고수(高手)임을 고려한다면, 그는 돌을 끝까지 붙잡고 늘어질 때와 돌을 던질 때를 잘 알고 그러한 결단을 내리는 것이리라.

크리스천으로서 나의 삶에 있어서 결단의 때는 어떻게 알 수 있나?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잣나무로 방주를 지을 것을 명하신다(창 6:14). 하나님께서 장차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인데 너와 네 가족은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신다. 방주를 지으라고는 하셨는데 언제 홍수를 내릴 것이니까 몇 년 안에 완성해야 한다고는 말씀하지 아니 하셨다. 아마 처음 방주 짓기를 시작하였을 때 노아에게는 이렇게 큰 방주를 지으려면 몇 년이나 걸릴 것인지 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그는 묵묵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방주를 짓되 100년의 세월을 걸려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치수의 방주'(창 6:15)를 완성하였다. 40일 밤낮으로 계속 내리던 비가 그치고 서서히 마른 땅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노아는 방주에서 언제 나가야 할 것인지 그 때를 헤아리기 시작한다. 백 오십 일이 경과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잠잠하시기만 하다. 이 백 일이 지났는데도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까마귀를 내 보내고, 또 비둘기를 날려보낸다. 비둘기가 감람 새 잎사귀를 물고 옴을 보고 땅에서 물이 줄어들었음을 알게 된다. 다시 비둘기를 내어놓으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땅이 말라 거할 자리가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잠잠하시기에 나가기가 주저된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으로 임하신 것은 그로부터도 한 두 달이 더 지난 다음인--즉 하늘의 창들을 여시고 비를 내리기 시작하신지 일 년하고도 십 일이 더 경과된 다음이었다(창 8:14). 하나님이 노아에게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과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창 8:15-17) 말씀하시매,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모든 육축과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다(창 8:18-19).

믿음으로 때를 기다리는 인내와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때를 아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너무 조급하여 때가 오기 전에 행동할 것도 아니요, 너무 태만하여 때가 왔는데도 그냥 지나쳐버릴 것이 아니다.


Friday, January 27, 2012

노자의 세 가지 종류의 사람

 노자의 세 가지 종류의 사람


  성경구절: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함이니라." (고전 2:14)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덕경(德經)」제 41장):
     뛰어난 사람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행하고
     (上士聞道, 勤而行之)
     평범한 사람은 도를 들으면 간수하고 있는 듯하기도 하고 잃어버린 듯하기도 하며
     (中士聞道, 若存若亡)
       어리석은 사람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으니 비웃지 않으면 도가 되기에 부족하다.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不足以爲道)
     (When the best student hears about the way, he practices it assiduously;
        When the average student hears about the way, it seems to him one moment there and
       gone the next;
      When the worst student hears about the way, he laughs out. If he did not laugh,
       it would be unworthy of being the way.)

노자의 도를 듣는 세 종류의 사람의 구분은 예수님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마태 13장)에서 세 종류의 밭의 사람과 바울의 세 종류의 영적 상태의 사람(고전 2:14-3:3)의 구분과 잘 맞아떨어집니다.
노자의 ‘어리석은 사람’(下士)은 예수님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길가’의 사람이요, 바울의 예에 있어서는 ‘육에 속한 사람’(고전 2:14)입니다. ‘길가’의 사람은 천국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주로 듣기를 거부하고, 혹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닫힌 마음으로 들으며 그 속에서 이를 비웃거나 가볍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는다”(마태 13:19)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노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리석은 사람이 비웃지 않는 천국 말씀’은 ‘천국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한다”(고전 2:14)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이 ‘육에 속한 사람’을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는 “멸망하는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노자의 평범한 사람’(中士)은 예수님의 돌밭’이나 가시 떨기’의 사람이요, 바울에게는 육 신에 속한 사람’(고전 3:1)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도를 듣고 긴가 민가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이 사람은 말씀을 들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마태 13:21, 돌밭’의 사람)이거나 혹은 “세상의 염려나 재리의 유혹에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마태 13:22, 가 시 떨기’의 사람)입니다. 바울의 ‘육신의 사람’은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자라지 않는 사람이요, 시기와 분쟁 등 육신의 소욕을 따라 행하기에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입니다(고전 3:1-3). 갈라디아서의 예로 말하자면, 이러한 사람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칠”(갈 3:3) 위험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 리가 가시나무가 아니라 무화과나무가 되고 찔레나무가 아니라 포도나무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말림을 당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 가지는 베임을 당함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5-6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노자의 뛰어난 사람’(上士)은 도를 듣고 부지런히 행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좋은 땅’의 사람이요, 바울의 ‘신령한 사람’ 곧 ‘성령에 속한 사람’(고전 2:15)입니다. ‘좋은 땅의 사람’에 대하여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의 신령한 사람은 성령의 은사를 받는 자요 또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노 자의 세 가지 종류의 사람에 관한 구분은 비단 도(道)를 수학(修學)하는 사람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사업을 하는 사람, 가정을 돌보는 사람 등 모든 분야, 모든 사물과 사건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上士)이 반드시 다른 분야에서도 ‘뛰어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사업이나 학문 등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교회생활을 하나 ‘십자가의 도’를 깨달음에는 둔하고 따라서 성령의 열매맺지 못하는 삶을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목회자로서, 저는 여러분이 ‘십자가의 도(道)’(고전 1:18)를 깨닫고 따라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에 뛰어난 신령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 성령의 많은 열매를 맺는 신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할 사안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들을 귀, 볼 눈,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들을 귀, 볼 눈, 열린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부정적으로 듣고자 함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듣고자 함이 필요하고, 발견하지 못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볼 것이 아니라 발견하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보고자 할 것입니다. 거부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인정하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 위에 자신의 약하고, 부족하고, 어리석음을 솔직하게 시인함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자기 과신(過信)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도우심이 임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그리스도의 영, 성령)가 그의 안에 거하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했습니다. 곧, 그리스도인으로서 열매를 맺지 못함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아니하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께서 그의 안에서 활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출석함이 자동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이 그를 이끌기에(요한 6:44 참고) 그가 교회에 나오는 것이지만,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성령의 열매맺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함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되, 머리로뿐 아니라 가슴과 마음으로 영접함이 필요합니다.
 

Tuesday, January 24, 2012

하나님의 기이하신 사랑

                                                           하나님의 기이하신 사랑


성경구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하나님은 참으로 이상하신 분이다. 그분은 잘생기고, 흠없이 온전하시고, 모든 이들로부터 흠모와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신 분인데, 몸과 마음이 비뚤어지고 뒤틀리고 괴팍하고 바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짝사랑하신 분이다. 우리는 마음이 비뚤어지고 못되어서 그와 같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나를 멀리 떠나 괴롭게 마소서.”라고 소리치는데도, 하나님은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게로 와다오.” 하신다. 때로는 애원하시며 때로는 오래 참으심으로 죄와 허물로 인해 추해지고 몰골이 사나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옷도 우리와 같은 것을 입기로 작정하시고 자신의 아름답고 귀한 옷을 벗어버리시고 이사야 선지자가 표현한 대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사 53:2) 육신을 입으셨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다.

  참으로 기이한 사랑이다. 못생기고 부족한 사람이 잘생기고 모든 것을 갖춘 상대를 죽자 사자 따라다닌 사랑이라면 혹 이해를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정반대의 경우이다. 인간의 육신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하나님이 왜 날 사랑하나?” 하고 놀랄 수밖에 없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던 나는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참 형상 예수 그리스도께로 조심조심 가까이 다가간다.

  “미녀와 야수(The Beauty and the Beast)”에서, 미녀의 연민과 사랑의 눈물이 죽어가는 야수의 몸에 떨어질 때 그 야수를 동여매고 있던 마술이 풀리며 본래의 미남 왕자의 모습으로 변한다. 지고하고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가 십자가상에서 예수의 물과 피로 떨어질 때 야수보다도 더 괴물스럽고 마음까지 비뚤어져 소망도 없이 서서히 죽어가던 나의 몸을 적실 때 나는 상실 이전의 나의 모습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회복한다.

톨스토이의 문제

                                                             톨스토이의 문제


성경구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 8:31-32)


  “나는 5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나의 전생애가 변하였다. 이전에 욕망하던 것을 욕망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이전에 구하지 않던 것을 갈구(渴求)하게 되었다. 이전에 좋게 보이던 것들이 좋지 않게 보이고 이전에 재미있던 것들이 별로 재미있지 않게 되었다. 이전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것들이 나에게 중요해지고 소위 행운의 무지개를 좇는 삶이 허무(虛無)하게 생각되었다. 나의 인생관(人生觀)과 가치관(價値觀)이 뒤바뀌는 것이 곧 예수 믿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이는 19세기말 러시아의 대 문호(文豪) 톨스토이(Leo Nikolayevich Tolstoy, 1828-1910)가 「나의 회심」이란 글에서 한 말이다.

톨스토이는 41세에 이미 불후의 대작「전쟁과 평화(War and Peace)」(1869)를 출간하고, 후에 「안나 카레리나(Anna Karenina)」(1877) 등을 발표함으로써 불세출(不世出)의 인물이 되지만 소피 베르(Sophie Behrs)와의 결혼생활(1862년 결혼)은 극도로 불행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가 죽는 날까지 그녀는 나의 목 주위를 누르는 한 바위일 것이다. 나는 나의 목을 누르고있는 이 바위로 인해 익사(溺死)당하지 않는 법을 터득해야 할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그의 결혼생활이 얼마나 부담스러웠던지 극명하게 말하고 있다. 아내와의 불화(不和), 가족들과의 마찰(摩擦)과 특히 내면의 자신과의 갈등(葛藤)이 톨스토이로 새로운 진리와 평안을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60세쯤에 복음서를 읽다가 이상적인 하나님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크리스천이 되었는데,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의 삶이 이로써 새로운 국면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표현한 대로 그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변한 것이 사실이다. 대문호로서 불후(不朽)의 명작을 남긴 그의 60년의 인생보다도 크리스천으로서 남은 생을 산 20년이 더 귀하고 값진 것이라고 그는 고백했다.

톨스토이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이후에 완벽주의의 삶을 살고자 한다. 사냥을 포기하고, 담배와 술을 끊고, 육식을 하지 않고, 성적으로 금욕생활을 하기로 작정한다. 그는 71세에 쓴 그의 마지막 대작 「부활(Resurrection)」(1899)의 수익금 전체를 당시 짜르(Czar)에 의해서 박해를 당하고 있던 재세례파(Anabaptists) 단체인 두코보르(Doukhobor)를 돕는 일에 사용한다. 또한 예수님의 산상수훈 해석으로부터 나온 그의 비폭력 철학은 간디나 마틴 루터 킹 등 비폭력을 주장하는 후세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톨스토이는 크리스천이 된 초기의 기쁨은 다 없어지고 여전히 불행한 삶을 살아갔다. 그당시 부패한 러시아 정교회에 비난을 퍼붓다가 교회로부터 파문당하고, 완벽한 사람이 되고자 한 그의 모든 노력은 실패로 끝난다. 결국 그는 명예도, 가족도, 재산도, 자신의 정체성도 잃어버린 채 마지막 평안을 찾아서 기차를 타고 한 수도원으로 향하다가 중한 병으로 한 기차역(Astapovo)에 내리게 되고 역장의 집에서 82세의 생을 마감한다.
                                                  
크리스천으로서의 삶 동안 톨스토이는 ‘복음의 이상대로 살수만 있었다면... 내가 그럴 수만 있다면’ 하는 독백과도 같은 소망을 한 순간도 놓지 못한 사람이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복음서에서 완벽한 인간상--하나님의 이상을 따르는 삶을 산 그리스도를 발견하였을 때 그는 분명히  크리스천으로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기를 원했다. 그의 남은 20년 여생을 통하여 그러한 삶을 살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완전을 향한 성화의 삶이 불완전한 인간의 어떠한 의지와 노력으로도 가능치 않음을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완전으로 향한 삶을 추구(追求)하고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면서 그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사라졌던 것이다.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나의 부족을 끊임없이 고백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부족한 모습을 내가 용납해야 한다. 나의 부족을 이미 하나님께서 용납하여 주셨다. 내 스스로가 온전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교만이며, 거기에는 주님이 역사하실 공간이 없다. 한편으로는 성화의 삶을 살기를 원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부족함을 끊임없이 고백할 때, 그때 비로소 성화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우리를 성령께서 도우사 그 길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게 하신다.

변소깐의 구더기

                                                                   변소깐의 구더기


성경구절: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사 66:24)


  버지니아에서 학교에 다닐 때 대학원생들 성경그룹을 인도하였다. 매주 금요일마다 20명정도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였는데 그 중에는 유학와서 믿음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연결기도(Chain prayer)로서 성경공부를 끝내는데 아직 기도를 못하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가도록 하였다. 어느 날 믿음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 분이 성경공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강하게 느끼고 자신의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기를 원하여서 입을 열었다. 그의 마음에는 감사에 대한 표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데 사람들 앞에서 처음으로 기도하는 것이라 말이 생각한 대로 잘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 아버지...변소깐에 구더기만도 못한 저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여주심을 감사합니다. ......” 그 다음에도 무엇이라고 기도하였지만 기억이 없고, 고개 숙인 모든 사람들이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는 그의 표현에 모두 이를 악물고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는다. 결국, 누군가가 터뜨린 웃음을 시발로 하여 모두 배를 잡고 깔깔 웃고 말았지만, 그의 표현은 구원받기 전의 우리 상태를 가리키기에 적절한 것이었다.

  죄의 삯으로 사망한 사람이 가는 지옥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헨나’(γέεννα)는 원래는 히브리어적 표현 ‘힌놈의 아들 골짜기’(םנה■ןב איג)에서 온 것인데, 이곳은 온갖 더러운 쓰레기를 버리고 또 소각하기 위해서 불을 지피는 곳이었다.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연기가 끊임없이 하늘로 오르고 매케한 냄새가 나는 더러움과 악취의 극치의 곳이었다.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면 우리의 종국은 변소깐의 구더기 신세보다도 못할 것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서 우리는 극에서 극인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깨닫고 은혜에 합당한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통 속에 사는 디오게네스의 행복

                                               통 속에 사는 디오게네스의 행복


성경구절: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편 84:10)


  그리-스의 철학파들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 큐니코스학파(Cynics=Cynic School)가 있다. 주전 5세기에서 4세기를 산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 444?-371 BC)란 사람이 창시한 것으로, 영어로는 '시닉스(Cynics)'라 번역하고 한국말로는 견유학파(犬儒學派)라고 부르는데 냉소주의(冷笑主義) 철학자 그룹이다. ‘큐니코스’란 이름은 원시적이고 반문명적인 삶을 사는 그들을 두고 ‘개’(큐논=κυνόν, 혹은 큐나리온=κυνάριον)라고 경멸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견유학파’란 번역도 아마 ‘개똥철학을 논하는 사람들’ 정도로 경멸의 의미일 것이다. 이 큐니코스학파에 속한 사람들은 그 이름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에 대항하여 스스로 다른 이름을 선택하지 않은 것을 보면 말이다.

이 큐니코스학파(Cynics)에 속한 사람들 중에 디오게네스(Diogenes: 412-323 BC)란 사람이 유명하다. 이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356-323 BC)과의 일화(逸話)가 또한 유명하다. 디오게네스는 평생토록 홑옷을 입고 통 속에서 살았는데, 하루는 알렉산더 대왕이 ‘통 속에서 거지같이 사는 유명한 철학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그에게 “무엇이든지 소원이 있으면 말하라. 그리하면, 내가 들어주리라.”고 대왕의 위엄을 갖추고 통 속의 디오게네스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때마침 햇볕을 쬐고있던 디오게네스는 그의 왕관과 화려한 의복과 위엄에 찬 알렉산더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귀찮다는 듯이 그 젊은이에게 말한다: “조금만 비켜 서주겠소? 햇볕이 들어오지 않으니까 말이오.” 알렉산더는 이 말을 들으며 경이감까지 든다: ‘이 자가 과연 내가 그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인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당당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알렉산더 대왕은 후에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더라면, 통 속에 사는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고 술회하였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알렉산더보다 56살이 더 많은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더는 같은 해인 주전 323년에 세상을 떠난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을 이 큐니코스학파에 속한 선생들과 비교한다. 사람들이 알기에, 목수의 아들이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던 예수님이  대제사장들에게, 바리새인들에게, 서기관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당당하고, 때로는 냉소적이며, 때로는 독설이 가득한 예수님의 말씀들과 행동들이 그들에게 견줄만하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가끔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까지 심한 말씀을 하신다. 그의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태 16:23)하고 꾸짖으시며, 돈궤를 맡았던 제자, 가룟 유다에게 ‘네가 이럴 수 있느냐? 나를 어찌 팔 수가 있느냐?’고 눈물로 하소연하는 대신에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한 13:27)고,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인 것을 아는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신다. 때로는 독설적이고, 때로는 냉소적인 예수님의 말씀이지만, 그 가운데 권위가 있고, 상대방의 폐부(肺腑)를 찌르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예리함이 있다. 그 말씀은 때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가 누구인가’를 깨닫게 하시며 우리의 약하고 넘어지기 쉬움을 그 앞에 고백하게 하신다. 사람들의 보기에 학문이 없는 자요 비천한 자요 약한 자요 가진 것이 없는 자처럼 보이지만, 교만한 자를 꼼짝못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과 지혜가 하늘로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여유와 부요함이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의 눈으로는 미련한 자요, 약한 자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지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하늘 나라의 것을 유업으로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20-21절에서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말씀한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임을 자랑으로 여길 때 이 세상 임금인 사단의 나라에서 가난하고 약함을 너무 애석하게 여길 것이 아니다.


목사님이 우는 이유

                                                               목사님이 우는 이유


성경구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워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사도행전 20:31)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계신 목사님을 안다. 그 분은 설교단 위에 설 때마다 눈물을 흘리신다. 마음씨 좋은 시골 아저씨처럼 투박하게 생기신 분이 설교하시다 말고 눈물을 흘리시다가, 눈물이 너무 많이 흐를 때면 뒤돌아 서서 손수건까지 꺼내셔서 엉엉 우신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저분 신상(身上)에 무슨 일이 생겼나?’ 짐작해본다. 그러나, 자기같이 부족한 사람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목사로 부르시고, 단 위에 세우시고 말씀을 증거하시게 함에 감격하여 우신단다.

  모름지기, 남자는 일생(一生)에 세 번만--태어날 때와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울어야 한다고 했는데, 목사가 된 다음에 눈물을 흘리는 횟수가 많아졌다. 목사가 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나같은 죄인을 구하여주신 것에 감격하여, 나에게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심에 감사하여 흘리는 체험적인 기쁨의 표현으로서의 눈물이었는데, 목사가 된 다음에는 기쁨의 눈물보다는 안타까움의 눈물이 더 많은 것 같다.

  성도들의 믿음이 어린아이처럼(=child-like) 순수한 것이라면 이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마냥 자라지 않아 어린아이와 같은(=childish) 상태라면 이는 목회자를 안타깝게 할 것이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함은 기쁨인데, 설교단 위에서 마음이 열려있지 않은 성도들을 내려다보는 것은 고통(苦痛)이리라. 목사님이 운다--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바로 증거하지 못한 것 같아서 울고, 둘째는 말씀을 들은 성도들의 삶의 변화가 더딤이 마음 아파 운다.

  목회자와 성도들은 특별한 관계이다. 목사가 그 교회를 떠났다고 해서 목사-성도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좋지 않은 모양으로 떠났다 하더라도 목사는 자기가 사역하던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이 잘 성장하고 교회가 주님 안에서 번성하기를 바라고, 성도들은 그 분이 다른 곳에서도 주님의 좋은 목회를 감당하기를 바랄 것이다. 바울서신을 통하여, 우리는 목회자로서의 바울의 이러한 심정을 헤아릴 수 있다. 고린도 교회, 갈라디아 교회, 에베소 교회, 빌립보 교회, 골로새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등에 편지하는 바울이 비록 그 교회들을 떠나 있으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 교회와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하기를 바라고 그들을 그의 기도 가운데 늘 기억하고 있음을 본다. 좋은 소식이 들려오면 그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좋지 않은 소식이 들리면 권면의--때로는 사랑의 눈물과 꾸지람이 담긴--편지로 그들을 훈계한다.

  눈물을 흘리고 설교를 마친 날이면 기분이 야릇하다. 예배 후에 어느 성도님이 물어보신다: “목사님,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아, 예,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다른 성도님이 말씀하신다: “목사님, 왜 그러세요. 제발, 울지 좀 마세요.” “예, 미안합니다.” 그러나, 다 큰 사람이 눈물을 흘려야 하는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런 말씀을 하는 성도님이 야속하다. 속으로 그분에게 당부한다: “목사가 울지 않게 제발 믿음생활 좀 잘해 주세요.”

진짜 예수, 가짜 그리스도

                                                     진짜 예수, 가짜 그리스도


성경구절: “너는 예루살렘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ת)하라.” (에스겔 9:4)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4,000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계시록 14:1)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 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666이니라.” (계시록 13:16-18)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계시록 14:9-11)


오래 전 사회 초년병으로서 직장생활을 할 때의 이야기다. 어느 날, 같은 과 동료 두 명과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여유를 즐기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주위를 살피며 다가오더니 조용하게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진짜 외제(外製) 선글라스가 있는데 한 번 보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우리를 여러 말로 유혹한다. “박 동선이 한국에 들어올 때 꼈던 안경도 있습니다.” 이 말에 동료중 한 사람이 ‘한 번 보자’고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좌우를 살피면서 가방 속에서 선글라스들을 꺼내 보인다. 대충 살피던 우리는 그 외제품(?) 상인에게 다짐해본다. “이거, 진짜 틀림없는 거죠?” “거기 적힌 상표를 보시면서도 그러세요, 참.” “얼맙니까?” “원래 가격은, 하나 당 십 만원이 넘는데, 하나에 2만원씩만 주세요.” 우리는 보통 안경 값(그 당시는 만원이하였다)에 비하면 비싸지만 그 상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진품을 참으로 싼값에 구하는 것이라고 속으로 쾌재(快哉)를 부르면서 두 개 혹은 세 개씩 샀다. 나도 거금 4만원을 옆 친구에 빌려서 두 개를 구입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우리는 다른 동료들에게 자랑하기 위하여 선글라스들을 내보였다. “이거, 진짜 외제 맞아?” 샘이 난 다른 동료들이 면밀히 점검작업에 들어갔다. “야, 이 친구들아, 이 spelling 좀 봐라. 이런, spelling도 제대로 모르냐?” “여기 r이 하나밖에 없잖아? 진짜는 r이 두 갠데, 니 그것도 모르나?” 하고 핀잔을 준다. “여기, 이것도 가짜 아니냐? 진짜는 z로 끝나는데 이건 s로 끝나지 않았냐?” 하면서 우리가 산 선글라스들이 모두 가짜, 유사품들임을 얄밉게도 잘도 지적해준다. “이런 건 몇 천 원을 달라해도 안 산다.” 엘리트 청년들인 척, 진품을 구별할 줄 아는 척, 외제의 spelling은 당연히 아는 척 허세를 부린 우리 세 명이 허술한 차림의 잡상인에게 보기 좋게 속아넘어가 가짜를 진짜로 알고 흥분하여 두, 세 개씩 무분별하게 산 것이 참으로 분하고 억울하지만 어찌 하랴.

그런데, 이런 일이 교회 안에는 더욱 더 많다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많은 경우에 가짜와 진짜가 구별이 잘 안 간다. 아니, 가짜가 진짜보다 오히려 더 멋있고 그럴듯하게 보일 때가 많다. 어떤 사람이 ‘천국을 보았다’고 하면 진짜-가짜를 판별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초청하여 집회를 연다. 어떤 권사가, 어떤 장로가, 어떤 목사가 희한한 은사를 체험했다고 하면, 어떤 신통한 능력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르면서 와 몰린다. 진짜 예수와 가짜 예수를 구별할 줄 모르고, 진짜 예수를 간증하는 집회보다 가짜 예수를 간증하는 집회에 사람이 많이 몰리는 까닭은 어찜인가? 진짜 예수를 간증하는 사람은 주님을 자랑하는데 반하여, 가짜 예수를 드러내는 사람은 자신을 자랑함을 알아야 하리라. 쉐익스피어의 어느 작품에도 있듯이, 진짜는 화려하지 않은 반면, 가짜는 화려하다는 사실을 유의함이 좋으리라.

교회 안에 재림예수라고 주장하는 가짜 예수들이 많은가 하면, 성경에도 가짜 그리스도(=적그리스도)가 나온다. 19-20세기에만도 세계적으로 20명 가까이에 이르는 사람이 자칭 재림예수라고 주장하였는데 그 중 거의 절반이 영광스럽게도(?) 한국사람 중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가짜 예수들이 한동안은 많은 추종자들을 얻음을 본다. 그것이 가짜로 밝혀지기까지는 어떤 때는 참으로 긴 세월이 걸린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가짜 그리스도인 적그리스도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첫 3년 반 동안은 자신이 재림한 그리스도인양 행세한다. 그러다가, 후 3년 반에 그 본색을 드러내고 그(=적그리스도)의 표(=mark)를 받게 하는데 이 짐승의 표의 숫자(=초대교회 사람들이 적그리스도로 보았던 ‘네로 황제’를 헬라어로 풀이한 숫자의 합계)가 666이다. 이 666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중에 한 가지 재미있는 해석은 이것이 진짜 예수의 숫자(=‘예수’의 헬라어에 해당하는 숫자로서 위경서 Sibylline Oracles 1.328-329에서 유래함)인 888의 유사품이란 것이다. 얼뜻 보아 가짜 그리스도(=적그리스도) 짐승의 수 666이나 진짜 예수의 표 888이 구별이 잘 안 간다.

세상과 타협하는 삶을 살므로 이마나 오른 손에 짐승의 표인 666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어린 양, 예수의 표인 888(혹은 다른, 진짜 예수의 표)인줄 알고 사는 사람이 많다. 이 두 표시가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짐승의 표는 주님의 날에 심판의 표적이요, 어린 양의 표는 하나님의 보호요 구원의 표적인 까닭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가 세상 것을 너무나 좋아하고 사랑한 나머지 가짜 예수, 가짜 그리스도를 좇아가면서 진짜 예수, 진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착각하지 않기를 바래본다.



인생의 사계(四季)

                                                              인생의 사계(四季)


  일년에 사계(四季)가 있듯이 우리 인생에도 계절이 있다. 봄이 있는가 하면 여름이 있고, 여름이 있는가 하면 가을이 있고, 가을이 있는가 하면 겨울이 온다.

  어떤 분과 대화하는 가운데 인생의 계절(季節)을 생각게 하는 일이 있었다. 양로원(養老院)에서 노인들을 돌봐주는 일을 하고 계신 분이 “노인이 되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시는 분을 보면 저까지 낙담이 돼요. 저는 제 몸을 잘 추수릴 수 있을 때까지만 살고 싶어요” 하신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오직 하나님께 달린 것을... 더욱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삶의 계절을 주셨을진데, 우리의 처한 계절에 충실하고 그 계절의 의미를 생각하는 우리이어야 하리라.

  일년의 사계(四季)와 같이 우리들은 인생(人生)에 유·소년기(幼·少年期), 청년기(靑年期), 장년기(壯年期)와 노년기(老年期)를 보낸다. 유·소년기(幼·少年期)에는 누구나 그 자신은 남들과 같은 경로를 밟아 결국은 죽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자신은 언제까지나 늙지 않고 죽지 않을 것처럼 생각한다. 자라기는 하되, 죽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공평(公平)의 하나님이시다. 나만이 인생의 사계(四季)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 여정(旅程)을 따라서 살게 하신다. 청년기(靑年期)에 있는 사람이 노년기(老年期)에 있는 사람을 업수이 여기지 못할 것은 그도 얼마 후에는 그 길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각각 그 나름대로 독특한 멋이 있어 지낼만하듯이 인생의 사계도 그 나름대로 독특한 멋이 있다. 다만, 일년의 겨울 다음에 봄이 오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확실(確實)한 것과는 달리, 인생의 겨울 다음에 만물이 생동(生動)하는 봄이 옴은 모든 사람에게 그리 확신 있게 보이지는 않고 소망 중에 기다려지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그러한들 우리 인생이 어찌하랴? 그것이 우리 육신의 죄(罪)로 인해 겪어야 할 과정(過程)인 것을.

  육신은 비록 죄의 법으로 인해 늙고, 병들고, 죽으나, 우리의 영혼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주님의 낙원(樂園)에 들어갈 수 있음을 감사한다. 다른 사람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나로 인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겪게 하심을 감사할 수 있으면 좋으리라.

  여름을 보내고 있는 청년으로서는 풍성하고 좋은 열매를 맺을 가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겨울을 보내는 분들은 인생의 겨울이 지나더라도 영원한 계절(季節)이 올 것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리라.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塑性)하기 위하여 있더라.”(요한계시록 22:1-2)

그럴 줄 알았어

                                                               그럴 줄 알았어
                           

  언젠가 20명 가까이 목사님과 사모님이 참석한 가운데 목사·사모 수련회를 가진 적이 있다. 순서 중에 목회하는 동안 겪은 어려움과 고통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목회자가 목회 현장에서 고통스럽게 생각하고 실망하는 것은 사람을 ‘너무’ 믿은 까닭”이라고 한 목사님이 말했다. ‘너무’ 믿은 까닭에 그 성도가 기대에 어긋난 말이나 행동을 할 때, “그럴 줄 몰랐어!” 하고 실망한다는 것이다. 다른 목사님이 반문한다. “목사가 성도를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목회를 하나?” 맞는 말이다. 목회자가 성도를 믿을 수 없다면 목회 현장은 지옥이리라. 지혜로운 목사님은, “믿었던 성도가 기대에 어긋난 반응을 보이더라도, ‘그럴 줄 알았어!’ 할 때 목사의 실망과 고통이 작을 것”이라고 답변한다. 수련회에 참석한 모든 목사님과 사모님이 ‘아, 그것이 바른 지혜라’고 동의한다. 그래서 “그럴 줄 알았어!”가 수련회 이틀 간 유행어가 되었다. 그 목사님이 “그럴 줄 알았어” 말하는 뜻은 사람을 믿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믿되, 그가 실수가 많은 약한 인간이라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 혹 나의 상식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더라도 그를 이해하려고 하고, 혹 실수나 허물을 범하더라도 용납할 수 있는 여유와 아량을 가지라는 것이다.

  목회자만 교인에게 실망하고 고통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도 목회자에게 실망하고 어려움을 겪는다. 많은 경우에 교인이 목사에게서 받는 실망이 더 클 것이다. 이는 목사가 교인에게 갖는 기대감보다 교인이 목사에게 갖는 기대감이 더 큰 때문이리라. 그러나, 교인에게도 “그럴 줄 알았어!”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목사를 부르시되, 흠없고 티없는 완벽한 인생 중에서 부르신 것이 아닌 까닭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 27-29절에서 지적하듯이, 주님의 온전하시고 지혜로우심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오히려 약하고 미련한 인생 중에 택하신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실망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람들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교회 밖에는 “그럴 줄 몰랐어!” 할 일들이 더 많다. 부모를 난사해서 죽인 ‘메넨데스(Menendez) 형제'의 사건을 듣고 재판을 지켜보며, 미식축구(Pro-football)의 영웅 심슨(O.J. Simpson)의 재판의 결과를 접하며, 일국의 대통령이었던 두 사람의 뇌물성 비자금 조성 액수가 각각 수천억원을 헤아린다는 신문기사를 읽으며, 독도가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본 정부의 망언을 들으며, “아니, 이럴 수가?” “정말, 그럴 줄 몰랐어” 분노하며 실망한다.

예수님도 인생들을 ‘지나치게’ 믿지 않으셨다. 그를 따라 다니던 수천 명의 무리가 그를 떠난 것에 대해서 실망치 아니하셨고, 그의 12 제자 중에 가룟 유다가 그를 팔 자임을 알게 되셨을 때에도, “아니, 네가 이럴 수가?” “그럴 줄 몰랐어!” 하지 않으셨다. 그의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가 그를 세 번 부인할 것을 예견하실 때, 그의 연약함까지도 아셨기에, “그럴 줄 알았어!” 하는 마음으로 그를 용납하셨다.

  “그럴 줄 알았어!” 함은 신앙공동체인 교회에 속한 성도들과 목회자를 믿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이 세상을 불신의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조언이 아니다. 상호 신뢰와 신실함의 바탕 위에서 교회와 사회에 속한 사람의 삶을 살아가되, 남이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그도 허물과 실수를 범할 수 있는 나와 같은 연약한 인간임을 깨닫는 지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