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anuary 24, 2012

통 속에 사는 디오게네스의 행복

                                               통 속에 사는 디오게네스의 행복


성경구절: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편 84:10)


  그리-스의 철학파들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 큐니코스학파(Cynics=Cynic School)가 있다. 주전 5세기에서 4세기를 산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 444?-371 BC)란 사람이 창시한 것으로, 영어로는 '시닉스(Cynics)'라 번역하고 한국말로는 견유학파(犬儒學派)라고 부르는데 냉소주의(冷笑主義) 철학자 그룹이다. ‘큐니코스’란 이름은 원시적이고 반문명적인 삶을 사는 그들을 두고 ‘개’(큐논=κυνόν, 혹은 큐나리온=κυνάριον)라고 경멸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견유학파’란 번역도 아마 ‘개똥철학을 논하는 사람들’ 정도로 경멸의 의미일 것이다. 이 큐니코스학파에 속한 사람들은 그 이름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에 대항하여 스스로 다른 이름을 선택하지 않은 것을 보면 말이다.

이 큐니코스학파(Cynics)에 속한 사람들 중에 디오게네스(Diogenes: 412-323 BC)란 사람이 유명하다. 이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356-323 BC)과의 일화(逸話)가 또한 유명하다. 디오게네스는 평생토록 홑옷을 입고 통 속에서 살았는데, 하루는 알렉산더 대왕이 ‘통 속에서 거지같이 사는 유명한 철학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그에게 “무엇이든지 소원이 있으면 말하라. 그리하면, 내가 들어주리라.”고 대왕의 위엄을 갖추고 통 속의 디오게네스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때마침 햇볕을 쬐고있던 디오게네스는 그의 왕관과 화려한 의복과 위엄에 찬 알렉산더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귀찮다는 듯이 그 젊은이에게 말한다: “조금만 비켜 서주겠소? 햇볕이 들어오지 않으니까 말이오.” 알렉산더는 이 말을 들으며 경이감까지 든다: ‘이 자가 과연 내가 그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인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당당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알렉산더 대왕은 후에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더라면, 통 속에 사는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고 술회하였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알렉산더보다 56살이 더 많은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더는 같은 해인 주전 323년에 세상을 떠난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을 이 큐니코스학파에 속한 선생들과 비교한다. 사람들이 알기에, 목수의 아들이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던 예수님이  대제사장들에게, 바리새인들에게, 서기관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당당하고, 때로는 냉소적이며, 때로는 독설이 가득한 예수님의 말씀들과 행동들이 그들에게 견줄만하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가끔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까지 심한 말씀을 하신다. 그의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태 16:23)하고 꾸짖으시며, 돈궤를 맡았던 제자, 가룟 유다에게 ‘네가 이럴 수 있느냐? 나를 어찌 팔 수가 있느냐?’고 눈물로 하소연하는 대신에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한 13:27)고,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인 것을 아는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신다. 때로는 독설적이고, 때로는 냉소적인 예수님의 말씀이지만, 그 가운데 권위가 있고, 상대방의 폐부(肺腑)를 찌르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예리함이 있다. 그 말씀은 때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가 누구인가’를 깨닫게 하시며 우리의 약하고 넘어지기 쉬움을 그 앞에 고백하게 하신다. 사람들의 보기에 학문이 없는 자요 비천한 자요 약한 자요 가진 것이 없는 자처럼 보이지만, 교만한 자를 꼼짝못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과 지혜가 하늘로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여유와 부요함이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의 눈으로는 미련한 자요, 약한 자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지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하늘 나라의 것을 유업으로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20-21절에서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말씀한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임을 자랑으로 여길 때 이 세상 임금인 사단의 나라에서 가난하고 약함을 너무 애석하게 여길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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