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pril 11, 2012

최고의 지혜

                                                                    최고의 지혜


성경구절: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는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1:7)


장자(壯者) 내편(內篇) 대종사(大宗師)에 보면, “하늘이 하는 일을 알고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사람으로서 최고의 지혜에 도달한 사람이다. 하늘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자연 그대로 살아가고,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그의 지식이 아는 바를 가지고 그의 지식이 알지 못하는 바를 키워 나가니, 그렇게 타고난 수명을 다하면서 중도에 일찍 죽어버리지 않는 사람은 바로 지혜가 훌륭한 탓이다”고 했다. 여기서 장자(壯者)의 하늘은 옥황상제, 혹은 하나님이라기보다는 자연 또는 천지만상의 조화에 가까운 뜻이지만,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이라고 해석해도 뜻이 잘 통한다. 곧,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고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사람으로서 최고의 지혜에 도달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그러한 사람은 없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은 모르더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뜻은 헤아려 알려고 노력하고 알지 못하더라도 말씀에 따르는 순종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있나 하면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고있다. 그 이유는 사람이 하는 일의 의도도 이해할 수 없고,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은 더욱 깨달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를 혼란케 하며 또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성도로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때로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하나님을 잘 믿고자, 경건한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는데도 이 세상에서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다닌다고 하지만 윤리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못한 삶을 살아가는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축복해주시는 것 같음이 우리를 속상하게 하고 혼란스럽게 한다.

하나님이 잘 믿는 사람들에게는 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다 확실하신 세상 축복을 내려주시면 그 하나님을 잘 믿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사람들의 이러한 바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계신지 안 계신지 묵묵무답(黙黙無答)이시다. 그래서, 교회 안에 하나님의 일을 참으로 열심으로 자신의 일보다 더 돌보는 사람들을 찾기가 힘들다. 믿음을 갖되,  할 수만 있다면, 구원에 간신히 턱걸이 할 정도의 믿음만 갖기를 원한다. 이 세상 삶이 끝난 다음에나 있다고 하는 하나님의 칭찬이나 상급은 받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믿음이 과연 구원 받을만한 믿음인가?
구원 받을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죄사함과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으며 소망 중에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은혜를 베푸신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를 원하며 몸이 따라가든 따라가지 못하든 주님의 일을 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친히 인도하시며 돌보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셨지만 이스라엘의 믿음이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었으며 그들의 생활이 하나님을 위하여 진정으로 헌신하는 것이었나?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그렇지 못했음을 발견한다.
그들 가운데 분명히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공급하여 주시고 옷과 신발이 닳지 않게 하셨는데, 어찌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그렇게 불신과 불경건의 모습으로 살아갔는가?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없음이 문제가 아니요, 인간 마음 가운데 항상 도사리고 있는 교만이 문제이다. 그 교만이 일이 되어짐의 과정과 종국을 결정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이 사람의 판단대로 되어지지 아니할 때 이 미련한 인간은 지혜의 하나님을 향하여 불신(不信)의 원망을 발하고 하나님을 부인한다.

하나님이 항상 인간의 예상대로, 바람대로, 공평의 원칙대로 행하셔야지만 ‘참 하나님’이 되시는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모습을 보이실 때나 보이시지 않을 때나 소수의 믿음의 사람들이 존재해왔다. 이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을 낮추어 절대주권의 하나님과 그의 말씀 앞에 항상 순종하기를 원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의 순종은 하나님을 항상 잘 이해하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모습을 밝히 보기에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기에, 나의 뜻이 그분의 뜻과 다를 때에라도 그가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믿기에, 지금은 나의 형편이 고통과 슬픔이어도 그가 결국에는 나를 평안과 기쁨으로 인도하실 것을 알기에 그 말씀에 순종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세상 형편이 되어짐을 보면서 하나님을 얼마만큼 믿어야 할 것이며 하나님의 일은 얼마만큼 감당하여야 할 것인가 계산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미련한 지혜자’를 원하신다. 미련한 지혜자는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미련하게 보이나 하나님의 눈으로는 순종의 믿음이 있는 지혜자이다.
구약의 노아의 예를 본다. 그는 당시를 산 세상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였다.
하나님께서 내가 정확히 얼마 뒤에 세상을 멸하시겠다고 미리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다만 그에게 “세상 끝날이 이르리니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지으라”(창세기 6:14)고 명하셨다.
노아가 커다란 방주를 지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조롱하고 웃음꺼리로 삼았다. “이 미련한 놈아 왜 이 쓸 데 없는 일을 하느냐?”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보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방주를 지어갔다. 때로는, 가족들도 그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이 살던 곳이 바닷가도 아니고, 하늘이 청청하기만 한데 이 방주는 무엇에 쓸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노아 자신도 때때로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고 마음 속에 의문을 던지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백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 결과가 무엇인가?
당장은 고통이요 답답함이지만, 묵묵히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며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미련한' 우리가 되기를 바래본다.

죄(罪)의 기원(起源)

                                                              죄(罪)의 기원(起源)


성경구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이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6:1-3)


그리스 신화(神話)에 등장하는 불의 신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하늘의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전해 주었다는 이유로 신들의 신 제우스(Zeus)의 노여움을 사서 카프카스(Caucasus) 산의 바위에 묶였다가 결국에는 독수리에게 간과 내장을 파먹혔다고 한다. 그보다 앞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와 인간들을 벌하기 위하여 판도라(Pandora: 그리스 신화, 인류 최초의 여자)에게 상자를 들려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보냈는데 그 상자의 뚜껑을 열었더니 온갖 해악이 나오고 상자 속에는 희망만이 남아 있었다고 했다. 이것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보는 해악과 절망, 인류 불행의 기원이라 할 것이다. 이 죄악의 기원이나 그리스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신과 인간간의 사랑이 독창적인 것 같지만 기존에 있었던 성경 속의 ‘죄의 기원’을 빌어서 변형시킨 것에 불과하다.

유대인들은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온 경위를 세 가지로 설명한다. 이 세 가지 중 둘은 성경에 나오는 내용이다. 첫째 설명은, 정경(正經)에는 나오지 않고 위경(Pseudepigrapha) 중 하나인 에녹2서에 나온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근원적 태초, 하늘 위의 하늘에도 하나님 이외에 아무 존재가 없을 때와 창세기 1장 1절의 천지창조의 태초 사이에 하나님께서 하늘에 천사들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임무를 맡기셨다. 그들 중 대천사(archangel)라고 하는 직분이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직분으로서 이조시대 임금의 명령을 전하는 도승지에 해당한다.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기 위해서 성경에 등장하는 미가엘, 가브리엘 등도 이에 속하는 천사들이다. 그 대천사 중 하나인 루시퍼(Lucifer)라고도 하는 사타나일(Satanail)이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다보니까 나중에는 자신의 권능이 마치 하나님만큼이나 되는 줄 착각하고 다른 천사들을 부추겨서 하나님께 대적하였다가 패하여 공중으로 내쫓김을 당하게 된다.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이 사타나일에게도 은혜를 베푸셔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공중의 권세를 그에게 주신다. 유대인의 지혜서 탈무드는 창세기 1장 하나님의 여섯 날 동안의 창조 중 둘째 날에만 “보시기에 좋았더라”란 말이 빠진 까닭을 이와 연관시켜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이 궁창 하늘--곧 공중의 권세를 사타나일에게 주실 것이기에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며 흡족해 하지 않으셨다고 해석한다. 천사의 타락이 인간 타락의 빌미가 되었다.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된 두 번째 설명이 이어진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사단의 다른 형태(agent)인 옛뱀이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하는 사건이다. 하와만 먹었을 뿐 아니라 아담도 함께 먹음으로써 둘이 선악을 구분하게 되었고, 그들의 벌거벗음을 보고 부끄러워하였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을 두려워하여 숲속에 숨는다. 선악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일 때는 죄 짓는 일이 적었는데, 인간이 선악(善惡)을 알면서부터는 선을 행하려 하지 않고 선으로부터 먼 악을 더 행하게 된다. 믿는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 일을 하는 대신에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고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더 행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바울은 이를 ‘죄의 법’이라고 했다. 로마서 7장 19-21절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罪)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한다.

셋째 설명은 노아의 홍수로부터 백이십 년 전의 사건으로서 창세기 6장에 그 개략이 나오고 위경서 중 에녹1서(1-36장)에 그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6장 1-2절에,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라고 했다. 에녹1서의 설명에 따르면, 세미아즈(Semyaz)와 아자젤(Azazel)이라고 하는 대천사의 지휘 하에 하늘나라 200명의 파수 천사들이 하늘로부터 지상을 굽어 내려다보니 사람의 딸들인 여자들이 아름다우매, 그들과 결혼하고 그들에게 화장하는 법을, 또 세상의 남자들에게는 전쟁하는 법을 가르침으로써 악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설명한다. 창세기 6장 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肉體)가 됨이라.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믿음의 사람 노아에게 백 년에 걸쳐서 방주를 만들게 하셨다. 백 년의 시간을 주신 것은 노아의 순종을 보시기 위함이기도 하였지만, 그간에 혹시 ‘인간들이 그들의 패역에서 돌이킬까’ 기대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함을 아시기에 창세기 6장 5-6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고 했다.

죄가 인간 세상에 들어와 번진 것은 마치 잉크 한 방울이 맑은 물이 담긴 병에 떨어진 것과 같다. 검은 잉크 한 방울은 처음 떨어진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곧 물병 전체에 번져서 물병의 물을 다 검게 만들어 버린다. 물병을 흔들 때 그 번지는 속도는 더욱 빨라서 삽시간에 물이 검게 변한다.

의심의 안개 걷히고

                                                                의심의 안개 걷히고


성경구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진리에 대한 갈구가 있는 사람은 그 진리를 만나는 순간 희열(喜悅)을 느낀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진리를 발견하는 비결은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학문은 ‘의심의 눈,’ ‘비판의 눈’을 갖고 있어야 발전이 있지만, 믿음에는 이러한 것이 장애요인(障碍要因)이 된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시내를 내려다보면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맑은 날 엠파이어스테이트(Empire State) 빌딩이나 씨얼스(Sears) 빌딩 꼭대기에서 뉴욕이나 시카고 시를 내려다보면 그 도시의 모양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안개가 낀 날은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가서 시내를 내려다보아도 그 모습을 헤아려 알 수 없다. 안개가 짙으면 짙을수록 더욱 보기가 어렵다. 우리의 눈이 의심이나 교만이나 욕심의 안개로 가려져 있을 때 우리는 보기 원하고 발견하기 원하는 믿음의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는 이미 목사로 안수 받고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조지아(Georgia)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제대로 선교하지 못하고 세월만 허비하다가 어느 날 밤중에 도망치다시피 하여 영국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배의 갑판에 서있는 그의 마음에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가 있었다. 폭풍이 배를 뒤흔들 때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때, 같은 배에 타고 있던 모라비안 교파의 크리스천들이 부르는 찬송소리가 들렸다. 그 찬송이 웨슬리의 마음을 평안하게 했다. 그는 생각에 잠긴다. ‘나는 목사인데도 이렇게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운데, 저 사람들은 어떻게 이 풍랑 속에서도 저렇게 평안할 수 있을까? 동일한 예수님을 믿는데 왜 나에게는 저런 기쁨과 평안이 없을까?’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 채 그는 목사로서의 사명을 생각하며 번민했다. 어느 날 그는 런던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거리를 걷고 있다가 조용한 찬송이 흘러나오는 교회의 문을 들어섰다. 무명의 목사가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었다. 이를 듣고 있던 웨슬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믿음의 진리를 발견한 그는 그 작은 교회 한 구석에 앉아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을 다녔고 대학 시절 홀리 클럽(Holy Club)을 조직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었다. 25세의 젊은 나이에 이미 엥글리칸(Anglican) 교파의 목사로 안수받은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트 목사였지만 이전까지 그에게는 구원의 기쁨이 없었다. 그는 머리로만 크리스천이었지 가슴에는 신앙이 없었다. 그의 나이 35세에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는 체험으로 말미암아 그는 감리교의 창시자가 될 수 있었다.

요한 웨슬리를 거듭나게 한  「로마서 강해」를 쓴 루터는 16세기 독일 신부 출신의 종교개혁자이다. 그가 아직 신부로 있을 때 그의 마음은 평온이 없었다. 아무리 고행을 해도 죄사함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로마에 있는 성당의 계단을 팔꿈치와 무릎으로 기어서 오르락내리락 해도 죄는 여전히 자신 안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그러던 그에게 한 말씀이 들어왔는데 로마서 1장 17절이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로써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단행할 수 있었다. 우리의 구원은 선한 행동과 고행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요, 면죄부를 사는 것으로도 아니요, 오직 우리의 구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한 깨달음은 일찍이 바울의 깨달음이기도 하다. 바울은 바리새파에 속한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했지만, 그에게는 죽음 앞에서 집사 스데반이 누렸던 기쁨과 평안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는 인간의 구원이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귀히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고 그에게 영원한 생명과 기쁨을 주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도로 변화되었다.

마음을 열어주는 찬송들

                                                         마음을 열어주는 찬송들


성경구절: “너는 예루살렘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ת)하라.” (에스겔 9:4)


찬송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 준다. 같은 찬송이지만 전에는 내가 감동을 느끼지 못했는데, 어떤 특별한 상황 가운데 동일한 찬송을 들을 때 그 찬송을 통하여서 성령께서 나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강한 감동을 주시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다. 오래 전의 이야기다. 장로교단의 노회 모임에 참석했는데, 시간 중에 한국인 2세로서 미국장로교 총회 대표단에 참여하여 북한을 방문하고 오신 K 장로님의 북한 방문 보고를 듣게 되었다. 그는 뉴욕에 있는 한 대학교에서 미생물학을 가르치고 있는 분인데 그가 보고하는 북한 실정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이미 다 아는 것이라 별 흥미거리는 아니였으나 보고 마지막에 그분이 북한 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곳 교인들과 같이 불러 은혜를 받았다는 찬송가 410장이 나를 사로잡았다. 체구가 왜소하신 장로님이 피아노를 직접 치며 찬송을 부르기 위해 건반에 손을 얹는다. 그분의 세련된 전주에 마음이 쏠리기 시작하고 그가 1절과 4절을 한국어로 찬송할 때 그가 북한 교회 교인들과 함께 이 찬송을 불렀을 장면이 연상되어 내게 한없는 성령의 감동이 임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주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곳도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공산정권의 독재 가운데 있을 때고, 세상이 주는 슬픔과 고통 중에 있을 때도 우리가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쓸 데 없던 자이던 나를 사랑하셔서 구속하시고 구원해 주신 까닭이다.

한국에서 아직 평신도로 신앙생활을 할 때 교회학교 부장으로서 교사들과 아이들과 함께 신체 장애-지진아 보육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들의 표정은 어두웠으며 우리 일행의 방문을 조금도 반기는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소외당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음을 굳게 닫고 있던 보육원 아이들이었는데 우리가 진정으로 그들과 대화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열었을 때 그들의 그늘지고 일그러진 표정 뒤에 감추어져 있던 아름다운 속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둘러앉아 함께 찬송하고 경험한 주님의 사랑을 서로 간증했다. 찬송과 대화로 시간가는 줄 모르다가 헤어질 때쯤 되어서는 그대로 떠나기가 아쉬워 그들을 다음 주일 저녁예배에 교회로 초대하여 특송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때 그들이 부른 찬송은 세상의 어떤 유명한 합창단의 노래보다도 아름답고 은혜스럽게 내 귀에 들려왔다.

        죄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 둘 수 없도다.
        오 주님 같은 친구 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으네
        나는 이 세상에 정 둘 수 없도다

그들의 찬송에 눈시울이 뜨거워옴을 느꼈다. 이 세상에서는 형제와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소년, 소녀도 있었다. 그들의 마음속에 주님이 함께 하시며 사랑의 손으로 고통받는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계시리라. 예수님은 바로 저들에게 처소를 예비해 주시기 위해 하늘로 먼저 올라가신 것이다.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올 때 쯤에 선교사가 되고자 하는 결단을 하고 기도하는 중에 나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은 찬송이 404장이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찬 404장 1, 3절)

나같이 무익하고 죄많은 인생까지 구원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워 그 사랑을 돌려드리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고 찾고 그 일을 증거하고 감당하고자 할 때 이것이 찬송을 통한 진정한 은혜요 감격이다.

버지니아에서 대학원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때, 찬송가 한 곡이 미국에 와서 주님을 처음 믿기 시작한 한 대학원생에게 격렬한 감동을 주었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 뿐일세

        나의 사모하는 선한 목자는 어느 꽃다운 동산에
        양의 무리와 늘 함께 가셔서 기쁨을 함께 하실까

        나의 진정 사모하는 예수여 음성 조차도 반갑고
        나의 생명과 나의 참 소망은 오직 예수뿐일세(찬 82장 1, 2, 5절)

부부 모두가 서울 문리대 생물학과를 나왔는데 아직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기도 전에 주님께서는 성령의 강한 감동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그의 창자까지 시릴 정도로 느끼게 하였다. 요란한 집회에서가 아니라 이제 성경을 공부하기 위하여 조용히 준비찬송을 하는데 그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으셨다. 그 감동이 얼마나 컸던지 그는 그것을 주체할 수 없어 했다. 그가 이제 시작하여 1년이 지난 그 공부가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 그에게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듯 보였던지 어느날 나에게 상담을 청하였다. 밤새도록 그 부부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강하게 체험하여 일생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한 사람이라도 왜 여전히 학문을 계속함이 필요한지 설득하였다. 후에 그는 장로가 되었고 부부가 모두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같은 학교의 강단에서 가르치고 있다고 들었다.

찬송을 통하여 우리가 성령의 감동 가운데 사랑과 은혜를 접하게 되지만, 그러나, 찬송이 우리 신앙생활의 긍극적인 목적이 되지는 않는다.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 문을 여는 한 방편이다. 그러므로 겸손하고 열린 심령으로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더 잘 알고자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오합지졸 이스라엘의 승리

                                                          오합지졸 이스라엘의 승리


성경구절: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이 민족들이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낼 수 있으리요 하리라마는 그들을 두려워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라.”(신 7:17-18)


두 명 이상의 선수들이 팀을 이루어서 경기를 하는 스포츠 종목은, 골프나 테니스 복싱 등 개인 스포츠와는 달리,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의 스타 플레이어(star player)가 있다고 하더라도 좋은 전적을 올리지 못한다. 팀에 소속된 선수들이 팀을 위하여 열심히 뛰고 이기겠다는 의지로 경기에 임할 때 좋은 전적을 거둘 수 있다. 알렉스 로드리게스(Alex Rodriguez)가 텍사스 래인저스(Rangers)에 있었을 때에는 그의 탁월한 공격력과 수비력에도 불구하고 만년 꼴찌를 면치 못하더니 그가 뉴욕 양키스(Yankees)로 옮긴 올해에는 오히려 월등하게 공격력과 성적이 좋음을 본다. 이는 스타플레이어가 없는 것이 팀웍이나 팀 케미스트리(Chemistry)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미국프로야구(MLB: Major League Baseball)에 소속된 팀들 전체를 볼 때에도 팀 연봉 총액이 낮은 팀들이 높은 팀들보다 좋은 성적을 거두는 예들을 종종 본다. 작년에 우승을 차지한 플로리다 말린스(Marlins)도 비교적 낮은 연봉의 팀이지만 선수 연봉 최고의 팀인 양키스를 누르고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말린스(Marlins)라고 하는 팀을 구성하고 있는 젊은 선수들이 마음을 같이 하고 투지를 불사를 때 놀라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용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팀’의 흥함과 쇠함도 이러한 세상의 이치가 적용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분명히 오합지졸의 모임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오합지졸이었기에 오히려 더 잘 뭉칠 수가 있었고, 각자의 힘을 의지하기보다는 모세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고자 하였다. ‘고라’라고 하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을 때에는 그가 사사건건 모세와 아론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었는데, 하나님이 그와 그를 추종하는 자들을 죽이실 때(민 16장) 오히려 단결이 잘되었다. 그들은 분명히 훈련받지 않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자 하는 동일한 목적을 갖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때 그들이 광야를 행진하면서 만나는 이방나라의 군대들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었다.

교회의 성장과 쇠함에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 사람들이 자기의 주장과 잘남을 드러낼 때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다만 잠잠하실 따름이다. 성도들의 마음 속에 계신 성령은 그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사람에게 그를 도우실 보혜사(Helper)가 되신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학식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오래 거하는 사람이나 잠시 머무는 사람이나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소속감을 갖고 주님의 지상명령인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동일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 오합지졸임을 자처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볼 때, 이러한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나타나고 성장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있다.

산 제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산 제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성경구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사무엘상 15장 22절에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신다. 호세아서 6장 6절에서도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제사나 번제를 별로 좋아하지 아니하시는구나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왜 이 말씀을 하시며 그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은 청종치 않고 명령에는 불순종하면서 제사와 번제를 드림이 못마땅하시기에 사무엘을 통하여 이 말씀을 하게 하셨다. 북방 이스라엘이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섬김이 없이 베델과 단에 마련한 ‘금송아지 여호와’에게 제사와 번제를 드리기에 그것들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슨 마음으로 어떠한 제사--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있는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며 순종할 마음이 우리 가운데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드리는 예물과 예배를 기뻐 받으실 것이다.

시편 51편 16-17절에서 다윗은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 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 하시나이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별로 아쉬움이 없이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구분됨이 없이 드려지는 번제나 제사는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다윗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제사는 형식이 아니라 제사드리는 사람의 심령(=마음)이라고 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되 통회하고 자복하는 심령으로--하나님 앞에 온전히 자신의 모든 죄와 허물을 드러내는 마음으로 나아오는 자를 기뻐 받으신다는 뜻이다. 예배를 드리러 나아오는 사람이 구분됨이 없고 정성이 담기지 않은 예물을 드릴 때 그 예물을 물리치시고 회개함이 없이 드리는 그의 기도와 예배를 기뻐 받지 아니하신다. 그러나, 동일한 예배장소에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통회하고 자복하는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꿇는 사람의 예물과 예배는 기뻐 받으시며 응답해 주신다. 다윗은 계속하여 51편 19절에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제사와 모든 번제를 원치 아니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모든 제사와 모든 번제를 원하시는 분도 아니시다.
하나님은 “의로운 제사”와 “온전한 번제”를 원하신다.
“의로운 제사”가 무엇일까?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심령으로 자기의 죄를 자복하여 하나님의 죄사함을 체험한 사람이 의로운 자이며 그가 드리는 제사가 “의로운 제사”이리라. 하나님 앞에 여전히 거북스럽고 해결되지 않은 관계를 갖고 나아오는 사람은 “의로운 제사”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온전한 번제”가 무엇인가?
“온전한 번제”는 구분되고 정성이 듬뿍 담겨있는 예물이리라. 자기 자신이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림은 “온전한 번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말라기서에서 왜 하나님은 유다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드리는 제물에 대해서 “너희가 나의 단을 더럽게 하였다”(말 1:7)고 말씀하시는가? 그들이 드린 제물이 눈먼 것과 저는 것과 병든 것(말 1:8)--찌꺼기 같은 것으로 여호와의 단에 드렸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번제--예물은 (사람이 사용하기 이전에) 구분된 것이며, 사람도 귀히 여기는 것이며, 마음의 정성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왜 아벨과 아벨의 제사는 열납(悅納)하셨는데, 가인과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아니하셨을까? 아벨은 양의 새끼로,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아벨에게는 구분됨이 있었고 가인에게는 구분됨이 없었다.
아벨은 양의 새끼들 가운데 첫 번째 새끼를 정성스럽게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라’고 구분하여 드린 반면에, 가인은 농산물의 모든 산출이 ‘다 내 것인데’ 그 중에 얼마를 그저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주일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전에 나아와 거룩하고 온전한 예배드림이 성도의 마땅히 행할 바이다. 주일날 교회에 나오기 전에 자기의 세상일을 하다가 허둥지둥 시간에 쫓기며 교회에 올 것이 아니다. 교회로 향하기 전에 충분한 여유시간을 갖고 하나님께 묵상기도하고 성경을 몇 장 읽는 것도 경건하고 온전한 예배에 임하는 사람의 바른 자세일 것이다.
주일예배에 나오는 옷차림도 바른 것이어야 한다. 외양을 중시여기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차림새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마음이 담긴 차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이나 주지사를 만나는 자리에도 청바지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에 청바지를 입고 나와도 좋으리라. 그러나, 대통령이나 주지사를 만나러 가는 자리에는 정장의 옷들 중에서도 제일 좋은 옷을 골라 입으면서, 아니 갖고 있는 옷들 가운데 마땅히 입을만한 옷이 없다고 고급의 옷을 구입하여 입으면서, 하나님을 만나러 나올 때는 아무렇게나 대충 입고 나온다면 이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세상의 주지사보다 못하시거나 아예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다.

성도에게 온전하고 구분된 주일예배 드림이 참으로 귀하고 중요한 것이 사실이나 더 귀하고 중요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그의 삶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권고하고 있다. 여기서 성도의 몸(σώμα)은 그의 전부--삶 그 자체를 의미한다. 주일날 거룩하고 온전한 예배는 드렸는데 그의 삶이 주일예배의 거룩함을 뒷받침 하여주지 못한다면 이는 “거룩한 산 제사”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의 삶--“영적 예배”의 삶이 아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거룩을 본받는 자의 삶이 되어야 하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이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


성경구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한 15:11);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요한복음 17:13)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내가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요한 15:1),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한 15:5)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과 예수님과 크리스천과의 관계를 설명하신다. 곧,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요, 예수님은 농부가 가꾸는 포도나무요, 크리스천들은 포도나무의 가지들이라는 것이다. 농부(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은 그가 가꾸는 나무가 많은 과실을 맺는 것인데,  이것이 또한 포도나무(예수님)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포도나무의 존재목적은 실한 포도를 풍성히 맺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줄기를 통하여 뿌리의 자양분을 잘 흡수할 때 그 가지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러나, 줄기에 붙어있는 것 같은 가지인데 속으로 벌레가 먹었다거나 또 다른 이유로 자양분을 흡수하는 구멍이 막혀 있다면 이 가지는 점점 말라져서 포도 열매는커녕 줄기에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가지를 “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않는 가지”(요한 15:4, 5)라고 하신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천이라고 하지만 주님 되신 그리스도 안에,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 거하지 않을 때 이 사람은 말라서 버리워지는 가지와 같은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한 15:6-7)고 말씀하신다.
이어서 예수님은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한 15:8)고 말씀하신다.
농부이시며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므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축복 가운데 거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 2:14)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거하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케 하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의 원하심도 하나님 아버지와 같다. 이는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가 되시기 때문이다.

아들로서 오신 예수님의 기쁨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다. 아버지의 계획이 아들의 순종함을 통하여 온전하여지는 것이다. 효자 아들은 아버지의 원하심을 위해서는 자기의 몸을 아끼지 않는다. 추운 겨울에 잉어를 들기를 원하시는 아버지를 위해서 얼음을 깨고 하루종일 쭈그리고 앉아서 잉어를 낚아서 아버지의 진지상에 올려드리는 것이 그의 기쁨이다. 아들로서 오신 예수님의 아버지의 사랑이 이와같으며 그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아버지의 뜻을 이룸이 그의 기쁨이다.
       
예수님의 기쁨은 아버지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라고 하신다. 뿐만 아니라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그의 제자들도 그와 같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을 볼 때 그의 기쁨이 배가된다.

10-11절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되 의무감으로가 아니라 마음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리할 때 이것을 보는 것이 그리스도의 기쁨이요, 이것을 행함이 성도의 기쁨이 됩니다. 이것이 “기쁨으로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이다.
예수님은 그의 큰 기쁨의 사랑을 나타내고자 친구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13-14절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신다.
죽음이 두렵고 고통스럽기는 육신의 옷을 입으신 예수님께도 마찬가지였지만 친구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친구의 구원과 영생을 위하여 기쁨으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다.

요한복음 17장 13절에서 예수님은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중에 일부이다.
예수님의 기쁨은 제자요 친구인 우리들을 사랑하심으로 그의 목숨을 버리심이다. 그리하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아 알아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거할 때, 그리스도의 기쁨이 이로서 충만하여지며 우리에게 전달되어질 수 있다.

잃은 자를 찾은 하나님의 기쁨

                                                      잃은 자를 찾은 하나님의 기쁨


성경구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누가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누가 15:10);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누가복음 15:32)


아리조나 주에서 생긴 일이다. 아버지와 함께 사냥하러 갔던 아이가 길을 잃어버려 캠프를 찾지 못하고 6일 밤낮을 헤매다가 마침내 캠프에서 32마일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돌아온 아이를 껴안고 흐느껴 울며 소리친다. “내 아들을 다시 찾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그러고는 너무 기쁜 나머지 기절하였다.
1천여 명을 동원하여 아들을 찾고 있던 아버지도 전화로 아들을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만다. 잃었던 아들을 찾은 그 부모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케 하는 장면이다.

밖에서 잘 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큰애와 둘째 애가 없어졌다. 이곳 저곳을 헤매며 한참을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러다가, 같이 놀만한 아이들의 집을 노크하며 우리 애들을 못 보았느냐고 물어본다. 몇 아이를 거쳐서 어떤 아이가 맞은 편 동의 누구네 집에 있을 것이라고 한다. ‘여기도 없으면 어떡하나’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그 집을 노크했을 때 ‘무슨 일이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빠꼼히 내다보는 아이들을 발견하였을 때는 순간 화가 치솟아 올랐다. 그러나, 이내 아이들을 찾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어떤 아들이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먼 곳으로 떠났다. 얼마간의 세월이 지나며 그는 타지의 삶에서 지치고 실망하여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부모님이 과연 자기를 받아줄지 몰라서 부모님께 편지를 띄웠다. 편지 내용 중에 “만일 저를 받아주실 뜻이 계시면 집 앞에 있는 오크나무(떡갈나무)에 노란 리본을 달아매 놓으시기 바랍니다”라고 썼다. 기차가 마을 가까이로 접근해 간다. ‘만일 부모님이 노란 리본을 나무에 매달지 않으셨으면 어떡하나?’ 기차가 마을에 거의 다 도달할 때 이 사람의 마음을 초조와 불안으로 어쩔 줄 모른다. 기차가 모퉁이를 돌아 이 사람의 집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집 앞의 오크나무도 눈에 들어온다. 그 나무를 바라보는 아들은 기쁨으로 넘친다. 나무 가지마다 온통 노란색의 리본으로 뒤덮여 있었다. 노란 리본을 하나나 둘만 매달아 놓으면 혹시 아들이 리본을 못 볼까봐 아버지는 나무에 온통 노란 리본을 매달아 놓았던 것이다.

세상에서 방황하는 자녀들을 생각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와 같다. 사람들이 아버지의 뜻을 모를까봐,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할까봐 하나님은 온통 당신의 뜻을 알게 하시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녀를 얼마나 기뻐하시는가 성경 곳곳에서 표현하신다.
하나님 밖에 있던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세 가지 비유를 들고 계시다.
                                                   
첫째는 일백 마리를 양을 갖고 있던 사람이 한 마리 양을 잃었을 때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말씀하신다. 아직 아흔 아홉 마리가 그 사람의 수중에 있지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귀하게 여기고 그 한 마리를 찾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고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또 찾은즉 찾은 기쁨을 벗들과 함께 누리기 위하여 잔치를 베푼다.

열 드라크마(=데나리온과 같은 가치의 헬라 화폐단위, 일꾼의 하루 품삯)를 갖고 있던 여인이 집안에서 한 드라크마를 잃었을 때 이 여인은 등불을 켜고 집안 구석구석을 쓸며 찾는다. 그리고 찾았을 때 벗과 이웃을 불러 그들과 함께 찾은 기쁨을 누린다.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타지에 나가 더 큰 세상을 배우겠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자기에게 유산으로 주기로 작정한 몫을 미리 달라고 떼를 쓴다. 아버지는 순순히 둘째 아들에게 그의 몫을 내어준다. 그러나, 세상 경험이 없고 물정이 어두운 둘째 아들은 곧 그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 남의 집에 돼지를 치는 머슴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집 주인이 야박하였던지 먹을 것도 배불리 먹지 못하여 돼지가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는 생활을 하게 된다.

주린 상태로 살아가던 둘째 아들은 생각다 못하여 그가 떠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한다. 그러나, 아들이라 일컬음 받기를 스스로 감당할 수 없어 아버지 집의 품꾼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아버지 집을 찾아가는 둘째 아들의 마음은 두근두근 하다. 객지에서의 생활이 자신 있다고 그렇게 큰소리 치고 나왔는데 이제 거지의 몰골로 품꾼의 하나로 써달라고 사정하려고 아버지를 찾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연로한 아버지는 멀리서 오는 초라한 몰골을 보자마자 둘째 아들인줄 알아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했다(눅 15:20). 그의 모든 잘못은 묻지도 않고 다만 잃어버렸다가 돌아온 아들을 찾은 기쁨으로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푼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회개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슙[שׁוב]은 ‘돌아오다’라는 의미임)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뜻이다. 누가복음 15장 32절에서 아버지는 불평하는 큰아들에게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스스로 정한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을 향하여서도 오래참음으로 기다리신다. 그들이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기쁨으로 껴안으실 것이다. 로마서 10장 21절에서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표현할 때,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한다.

아직 하나님 밖에 있는가? 하나님 안으로 들어와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아직 당신의 마음 밖에 계신가?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주님을 마음 중심으로 영접할 것이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회개함과 주님을 영접함으로 인하여 기뻐하실 것이며, 당신은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즐거워할 것이다.

성도의 진실한 삶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성도의 진실한 삶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성경구절: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언 12:22).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언 15:8)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언 21:3)


사람들은 때로 아부의 말을 듣고 기뻐한다. 그 사람의 의도가 의심스럽다고 여겨지더라도 밝혀지기 전까지는 그의 입에 발린 말에 솔깃해한다. 그러나, 그것이 입에 발린 말이요 거짓임이 밝혀질 때에는 실망이 크다. 이 세상에서 잘 살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아부도 할 줄 알고 적당히 거짓말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고지식한 사람이요 융통성이 없는 사람으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다.
그러나 진실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아진 그의 자녀들도 진실하고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외형으로만 하나님께 경배하고 제사 드리는 것은 원치 아니하신다. 그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며, 진실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신다. 세상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아도, 세상사람들한테는 멸시를 당하여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을 기뻐하신다고 했다.

왜 그런가?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양이기 때문에 그렇다. 부모가 자기를 닮은 자식이 더 사랑스럽고 더 정이 많이 가듯이, 우리의 영적 부모이신 하나님께서도 진실되고 정직한 자, 곧 당신을 닮은 자녀가 사랑스러우시고 기쁨의 대상이 된다.
“악인의 제사는 미워하신다”고 했다. 아무리 좋은 것으로 제사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고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동떨어진 자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물리치신다. 그러나, 제물을 구할 형편이 못 되어 제사는 드리지 못하고 기도만 드린다고 하더라도 심중이 주님께로 향하여 있고 정직한 삶을 사는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다.

하나님 앞에 제사--예배를 드리는 의미가 무엇인가?
자기의 행한 것--죄와 허물을 돌아보고 더욱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복된 삶을 살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 제사행위가 바르지 못하고 형식으로만 드려지는 것이라면, 이는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이를 물리치신다.
하나님 앞에 진실되고 의로운 제사--예배를 드린 사람이 의와 공평을 행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이 사람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이 사람에게 하나님은 구원과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 되시기에 그의 정직하고 진실한 삶으로 그의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다.

자녀로 인한 하나님의 기쁨

                                                            자녀로 인한 하나님의 기쁨


성경구절: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편 149:4)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를 기뻐하신다(시편 35:27, 149:4).
그의 백성을 기뻐하시되 그가 외적 조건(재물, 학벌, 지위)이 좋아서 기뻐하시는 것이 그의 자녀이기 때문에 기뻐하신다. 결혼을 하여 첫 아기를 얻은 기쁨을 기억한다. 그 아이의 얼굴이 하얗고 피부가 매끄럽지 아니하여도 나의 아이 되기 때문에 기쁜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로 말미암아 기뻐하신다. 시편 16편 3절에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라고 말씀하신다.
나의 모습이 내 눈에 초라하고 형편없이 보일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존귀하게 여기시며 나의 작은 마음이 드리는 감사와 찬송을 기뻐받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출중한 외적 조건을 갖고 있어서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주요 아버지’라 고백하기에 기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영원한 생명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시편 18편 19절에서 시편기자는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잘 되는 것(번성, prosperity)을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을 닮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주신 축복이 무엇인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결혼을 하여 자녀를 많이 낳고 이곳 저곳 흩어져서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세상에 흩어져서 살되 그저 무의미하고 별 볼 일 없이 살 것이 아니라 의미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셨다.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며, 어둠을 밝혀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는 역할을 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에서 살아가되 세상을 향하여 큰 소리 치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신명기 28장 63절에 보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볼 때, “여호와께서 너희로 번성케 하기를 기뻐하셨다”고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으면--즉, 그의 백성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따를 때, 그들로 번성하는 삶 살기를 원하신다.

하늘나라에서는 물론이고,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번성하며 축복 받는 삶을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과 계획에 따라서 이러한 외적 번성함이 없는 (그러나 내적 번성함은 여전히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축복하신 그 축복--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을 우리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에게 여전히 주시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와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기만 한다면 말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의 (마음의) 형통함을 기뻐하신다.
시편 35편 27절에 “나의 의를 즐겁게 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라고 했다.
여기서 형통(亨通, prosperity[KJV], welfare[RSV])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샬롬(םולשׁ)인데 이는 평안, 화평 또는 평안함으로 얻는 기쁨, 행복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가 쪼들리고 실망하고 슬퍼하며 고통당하는 삶을 살기를 원치 아니하시며 마음에 평안과 행복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신다.
형통--마음의 평안과 행복은 꼭 외적인 번성함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계심이 믿어지고 하나님께서 복주시는 분이심을 인정할 때 얻어진다.

하나님은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 하나님의 영--성령을 부어주신다.
이사야 42장 1절에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흙으로 빚으시고, 하나님의 생기(네샤마: נשׁמה--바람, 호흡, 삶의 기운)를 불어넣어 주심으로 그로 생령(生靈)이 되게 하셨다고 했다(창 2:7).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함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삶의 기운을 상실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의 생기--생명의 기운을 상실하고 이 세상에서 고통당하며 낙담하며 죽어가는 인간을 여전히 사랑하시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으며 그를 통하여 듣게 하시고, 첫 번째 생기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영(성령=루아흐: רוח=호흡, 생기, 바람)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원하신다. 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을 (진정한) 자녀로 여기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진정한 자녀가 되기 위해서 성령의 역사하심이 우리 가운데 느껴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즐거움 가운데 참여시키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의 달란트의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를 잘 경영하여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과 두 달란트를 잘 경영하여 두 달란트를 남긴 종에게 주인은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태 25:21, 23)고 말씀한 것같이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로 영원하신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기를 기쁨으로 기대하신다.
                                                   

성도의 찬송과 감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성도의 찬송과 감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성경구절: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편 69:30-31)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첫 번째 목적은 그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중심이 담겨있는 찬송과 감사를 통하여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셨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생육, 번성, 충만, 정복, 다스림”의 축복을 주셨는데,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지혜에까지 높아지기를 원하였던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범죄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신 축복을 상실하고, 찬송과 감사 대신에 원망과 불평을 발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 선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중심이 담겨 있지 않은 황소의 제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찬송함과 감사함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짐승의 번제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여서 하나님께서 이를 잡수시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번제--예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드렸는가를 보시고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드린 사람과 그 예물은 기뻐 받으시고, 그렇지 못한 마음으로 드린 사람과 그 예물을 기뻐 받지 아니하신다(창 4:4-5).
바울이 에베소서 1장 3-14절에서 반복적으로 말씀하는바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멀리 떠난 인간들에게 예정의 때가 이르매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회복하여 주시고자 하는 축복은 그들이 잃었던 영원한 생명을 주심이다. 사람들의 모든 죄와 허물을 사하여주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왜 이렇게 하시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것을 사람들을 통하여 듣고 보기를 원하시는 까닭이다. 에베소서 1장 3절에 “찬송하리로다”; 6절에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12절에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4절에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그의 지으신 사람이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그의 구원을 찬송하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그 일을 기뻐하신다.
스바냐 3장 17절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고 말씀한다. 선지자 스바냐의 신앙고백이다. 1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 중에 계신다고 약속하셨다. 스바냐는 그의 자녀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과 순종의 자녀들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는 모든 일을 이루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에게 구원의 기쁨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로 말미암아 기뻐하신다고 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어주신 자들이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는데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실 정도로 기뻐하신다고 했다. 죄와 허물의 짐을 벗어버리고 찬송과 감사와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참으로 대견하고 자랑스러우심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기쁨이다.
하나님께서 욥을 기뻐하시며 대견해하심이 이러하셨다. 욥기 1장 8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욥을 자랑하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영적 부모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조그마한 하나님에 대한 찬송과 사랑에도 감격해하시며 기쁨을 이기지 못해하신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의 주체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전능자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운 찬송을 부르듯이 우리의 영적 부모이신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주님을 찬송하는 우리로 말미암아 기쁨의 찬송을 부르신다.
우리는 우리의 입술로, 마음으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되, 기쁨으로 찬송해야 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사하셨으며, 우리를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으로부터 건지셨으며, 우리 중에 거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한없는 평안과 긍휼을 주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찬송하고 기뻐하는 삶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즐거운 노래를 부르실 것이다.
교회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의 입술에 기쁨의 찬송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권면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기쁨으로 찬송할 것이다. 우리의 입술과 마음과 우리의 삶 전체로 하나님을 찬송할 때, 이를 보시는 하나님의 기쁨 또한 넘치실 것이며 하나님 역시 즐거운 찬송을 부르실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조화하며 화답하며 기뻐하는 찬송의 삶이 우리 각 사람에게 나타나기를 바래본다.

순종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순종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성경구절: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를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자녀를 키우다 보면,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아이도 있습니다. 순종하는 아이가 단지 아버지가 무서워서 순종하는 것이라면 이는 그리 기쁜 일이 아닐 것이지만, 부모를 존경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이라고 한다면 이는 참으로 대견하고 기쁜 일입니다. 순종하는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고 마음 속으로부터 사랑함에서 나온 순종이라면 하나님은 이를 말할 수 없이 기뻐하십니다.

인류역사의 비극은 불순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창세기 2장 16-17절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에 대해서 엄격하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순종하기만 하였다면, 낙원에서 쫓겨나는 안타까움과 따라서 영원한 삶을 상실하는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심이 어떤 연유입니까?
이 사울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께 왕을 달라고 하였을 때(삼상 8:4-7)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백성의 요청을 들어주라고 하십니다. 물론, 그 마음에는 신정정치 대신에 왕정정치를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섭섭함을 갖고 계셨지만 말입니다. 어떠한 연유에서건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붓게 하시고 그를 왕으로 삼으신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삼상 10:1). 그러나, 그가 기름 부으시고 왕으로 삼으신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으로 그를 대신하게 하심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사무엘상 15장 11-12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고 하십니다.
다윗을 세우시고 그를 기뻐하시고 축복하심은 다윗이 사울보다 더 윤리적이고 외적 조건이 뛰어난 까닭이 아닙니다. 다윗의 심중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를 기뻐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의 믿음”입니다. 순종은 ‘믿음 이전의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8절에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그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지가 오래되었고 하란을 출발한 지도 십년이 더 지났는데 아직도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지 않음에 그의 마음에 원망이 생                                                   
깁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밤하늘의 뭇 별들을 가리키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라고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은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순종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여기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구십 구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실 때, 이 말씀이 믿어지지 않은 것이 사라 뿐이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생각만으로 본다면 이 말씀이 도무지 믿기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위대함은 ‘믿음이전의 믿음’--순종함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내 아내 사라의 경수가 끊어졌는데요.’ ‘우리 주위에 저처럼 나이 들어서 아이를 가진 사람이 없는데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매 순종함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4장 18절에서 “아브라함이 (후손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순종함으로) 믿었으니”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할 때 마침내 그의 나이 백 세 때에 약속의 자녀 이삭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약속의 자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주저함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사라에게 이 일을 의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했다면, 사라의 성격상 그대로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고뇌와 고통이 없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이것이 하나님의 시험인 줄 알았겠습니까? ‘나의 믿음이 어떤지 시험하시는 것일 뿐이야.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흉내만 내면 되는거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인가 중지시키실꺼야.’ 이런 계획된 짜임 속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다만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으로 사흘길을 행하여 모리아산에 이르고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기 위하여 그를 데리고 산을 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다른 것은 다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할 때 이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에서 우리는 순종하는 믿음의 결정체를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8절에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미리 가르쳐주신 대답도 아닌데 그의 순종이 그로하여금 극한 감동을 주는 믿음의 대답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또한 부활의 하나님을 증거하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약속의 아들 이삭을 통하여 그의 후손이 하늘의 뭇별과도 같이, 바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의 자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명백한 상충(conflict)인데 아브라함은 이를 가지고 하나님께 따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보라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과 명령의 모순을 몰랐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17-19절에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증언합니다.
경수가 끊긴 그의 아내 사라의 나이 구십세와 그의 나이 백세에 약속의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지금 이 아들을 번제물로 취하신다고 하더라도 그의 언약을 이루실 분이심을 순종의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바람의 고백은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입니다. 이 믿음의 고백이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시게 했겠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감동시키셨겠습니까? 요즈음도 이러한 고백을 우리가 할 수 있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창세기 22장 12절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극박한 목소리로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기쁘심과 만족하심이 이 말씀 가운데 가득히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순종의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순종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아브라함을 축복하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또 영화롭게 하시는 순종이 어떠한 것인지 우리로 알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8-1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이름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증거합니다.
또, 바울은 로마서 6장 16절에서 “(하나님의)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른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마음 중심에서 주님을 사랑하기에 그에게 순종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복 주시기를 원하시며, 구원하시고, 그의 이름을 높이실 것입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나는 이적을 행하기보다는 순종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입니까?
우리에게 제사보다 나은 순종이 있어야 할 것이며 수양의 기름보다 더 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청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의 기쁨

                                                             하나님을 찾는 자의 기쁨


성경구절: “무릇 주를 찾는 자는 다 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편 40:16)
“주를 찾는 모든 자로 주를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로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편 70:4);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시편 105:3)

하나님은 ‘기쁨의 근원’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6일에 걸쳐서 창조하실 때 자신의 창조하신 것에 대하여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을 일곱 번 반복하십니다(1:4, 10, 12, 18, 21, 25, 31). 그런데 특기할 만한 것은 궁창(=하늘, 공중)을 지으신(“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시기 위하여”: 7절) 두 번째 날에 대해서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이에 대해 탈무드는 아마도 공중의 권세를 사탄에게 주실 것이기에(엡 2:2 “공중 권세 잡은 자”) 그 표현이 빠지지 않았나 추정합니다.
그러나, 지구의 형성--땅과 바다--과 땅 위에 풀과 채소와 나무를 창조하신 셋째 날과 땅 위에 생물과 사람을 창조하신 여섯 째 날에 대해서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표현이 각각 두 번씩(1:10, 12; 1:25, 31)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살게 하실 땅과 땅 위에 피조물을 창조하심을 기뻐하셨다는 증거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심에는 그 기쁨이 특별하시기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31절)

둘째 날을 제외한 각 날의 창조에 대하여 “보시기에 좋았더라” 란 표현이 일곱 번이나 반복하여 사용된 것은 하나님께서 본래 만드신 세상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자유롭고, 죄와 허물의 문제가 없고, 오직 즐거움과 기쁨만이 넘쳐나는 장소로 계획되어졌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꼐서 그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첫 번째 사람--아담과 하와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동산, 낙원(파라다이스: παράδεισος)은 축복과 기쁨의 장소였습니다. 낙원은 blissful, 즉 더없이 행복한 또는 기쁨이 가득 찬 장소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에게 허락하신 낙원은 늙음이나 아픔이나 슬픔이나 병듦이 없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뱀이 그들을 미혹할 때 아담과 하와는 거기에 넘어가고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지고의 기쁨과 즐거움의 장소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그들에게 생노병사의 고통과 슬픔이 찾아들었습니다. 썩지 않을 것으로 창조되었던 것이 썩어짐에 종노릇하게 되었습니다(롬 8:21).
그러나,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꼐서는 그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본래 허락하셨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경륜(=오이코노미아, 인간구원, 엡 1:9)의 때가 이르매 사람들을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요한 1:14). 이 사건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9-10절에서,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인간구원)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은 우리들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기쁨을, 하나님 안에 있는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전에 아담과 하와의 타락함으로 잃어버렸던 낙원(=Lost Paradise)을 다시 되찾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The New Heaven and the New Earth)'이 그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서 그곳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하심으로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도래될 기쁨의 장소를 소망 중에 기다리되 우리는 현재 이 세상에서도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생활할 수 있습니다. 이는 현재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며,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은 기쁨의 근원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쁨의 신앙의 삶을 살아가면서 기쁨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기쁨을 함께 기뻐하시며,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기쁨의 찬송과 감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습 3:17).

교회는 주님의 기쁨과 즐거움을 소개하며 제공할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기쁨의 근원이신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며 주인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상실한 기쁨의 원인과 기쁨의 장소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며, 우리의 기쁨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셨는데, 우리에게 기쁨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목회자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기쁨이 있고, 성도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하며 찬송하는 기쁨이 있는 교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 위에, 기쁨을 상실하고 여전히 암울한 가운데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제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축복(blessings) 받기를 좋아합니다. 찬송가 가사에도 있듯이(1장, 28장)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우리가 말하는 축복은 기쁨을 동반합니다. 기쁨(bliss)이 없는 복(blessing)은 참된 축복이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업이 번창하여 백만장자가 되었는데 어떤 연유(상실, 고통)로 인하여서 그 사람에게 기쁨이 없다면 이는 진정한 축복은 아닙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복은 기쁨이 따릅니다. 시편 1편 1절에 나오는 복(“복 있는 사람은”)--아슈레이(blessed, happy)--은 "그 마음에 평안(행복, 기쁨)이 계속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기쁨과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교회에 함께 하시는데 우리에게는 기쁨과 복이 넘쳐납니다.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


성경구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세기 1:28, 31)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6일에 걸쳐서 창조하실 때 자신의 창조하신 것에 대하여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을 일곱 번 반복하십니다(1:4, 10, 12, 18, 21, 25, 31).
그런데 특기할 만한 것은 궁창(=하늘, 공중)을 지으신(“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시기 위하여”: 7절) 두 번째 날에 대해서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이에 대해 탈무드는 아마도 공중의 권세를 사탄에게 주실 것이기에(엡 2:2 “공중 권세 잡은 자”) 그 표현이 빠지지 않았나 추정합니다.
그러나, 지구의 형성--땅과 바다--과 땅 위에 풀과 채소와 나무를 창조하신 셋째 날과 땅 위에 생물과 사람을 창조하신 여섯 째 날에 대해서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표현이 각각 두 번씩(1:10, 12; 1:25, 31)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살게 하실 땅과 땅 위에 피조물을 창조하심을 기뻐하셨다는 증거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심에는 그 기쁨이 특별하시기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31절)

둘째 날을 제외한 각 날의 창조에 대하여 “보시기에 좋았더라” 란 표현이 일곱 번이나 반복하여 사용된 것은 하나님께서 본래 만드신 세상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자유롭고, 죄와 허물의 문제가 없고, 오직 즐거움과 기쁨만이 넘쳐나는 장소로 계획되어졌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첫 번째 사람--아담과 하와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동산, 낙원(파라다이스: παράδεισος)은 축복과 기쁨의 장소였습니다. 낙원은 blissful, 즉 더없이 행복한 또는 기쁨이 가득 찬 장소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에게 허락하신 낙원은 늙음이나 아픔이나 슬픔이나 병듦이 없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뱀이 그들을 미혹할 때 아담과 하와는 거기에 넘어가고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지고의 기쁨과 즐거움의 장소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그들에게 생노병사의 고통과 슬픔이 찾아들었습니다. 썩지 않을 것으로 창조되었던 것이 썩어짐에 종노릇하게 되었습니다(롬 8:21).
그러나,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본래 허락하셨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경륜(=오이코노미아, 인간구원, 엡 1:9)의 때가 이르매 사람들을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요한 1:14).
이 사건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9-10절에서,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인간구원)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은 우리들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기쁨을, 하나님 안에 있는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전에 아담과 하와의 타락함으로 잃어버렸던 낙원(=Lost Paradise)을 다시 되찾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The New Heaven and the New Earth)'이 그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서 그곳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하심으로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도래될 기쁨의 장소를 소망 중에 기다리되 우리는 현재 이 세상에서도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생활할 수 있습니다. 이는 현재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며,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은 기쁨의 근원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쁨의 신앙의 삶을 살아가면서 기쁨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기쁨을 함께 기뻐하시며,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기쁨의 찬송과 감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습 3:17).

교회는 주님의 기쁨과 즐거움을 소개하며 제공할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기쁨의 근원이신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며 주인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상실한 기쁨의 원인과 기쁨의 장소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며, 우리의 기쁨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셨는데, 우리에게 기쁨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목회자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기쁨이 있고, 성도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하며 찬송하는 기쁨이 있는 교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 위에, 기쁨을 상실하고 여전히 암울한 가운데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제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축복(blessings) 받기를 좋아합니다. 찬송가 가사에도 있듯이(1장, 28장)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우리가 말하는 축복은 기쁨을 동반합니다. 기쁨(bliss)이 없는 복(blessing)은 참된 축복이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업이 번창하여 백만장자가 되었는데 어떤 연유(상실, 고통)로 인하여서 그 사람에게 기쁨이 없다면 이는 진정한 축복은 아닙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복은 기쁨이 따릅니다. 시편 1편 1절에 나오는 복(“복 있는 사람은”)--아슈레이(blessed, happy)--은 "그 마음에 평안(행복, 기쁨)이 계속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기쁨과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교회에 함께 하시는데 우리에게는 기쁨과 복이 넘쳐납니다.

화평케 하는 자의 복

                                                                 화평케 하는 자의 복


성경구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마태 5:9).


산상수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의 받을 복”에 대해서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먼저 “화평케 하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에베소서 2장 14-18절에서 바울은 “그(=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화평케 하는 일’을 감당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낮아지신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또한 십자가를 지셨다. 화평케 하는 일을 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낮아짐이 필요하다. 자신을 돌아봄에는 인색하고 다른 사람을 평가함에는 관대함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에게는 비판적이고 다른 사람을 대함에는 긍휼함이 필요하다. 화평케 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할만한 조건들을 발견하여야 한다. 해서, 그들이 미운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픈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와 나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그로 더불어 화목할 수 있어야 한다.

한 강도가 어느 집에 들어갔다. 강도가 집주인에게 권총을 겨누며 ‘손을 들라’고 말한다. 강도의 말에 주인은 한쪽 손만을 든다. 강도는 ‘다른 쪽 손도 들라’고 강압적으로 말한다. 주인은 얼굴을 찡그리며 ‘오른 손에 신경통이 있어서 들 수 없는데요’라고 대답한다. 강도는 주인에게 “신경통이 있어요? 사실은 나도 신경통이 있는데...” 하고 그들은 밤을 새워서 그 신경통에 대하여 고통스러움과 치료방법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다. 한 사람은 죽일 수 있는 입장이고 다른 사람은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입장이었지만, 신경통이라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이 그들을 가깝게 묶은 것이다.

우리 교우들은 서로에게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많은 공통점이 있다. 우리 모두 예외 없이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의 짐으로 인하여 항상 마음이 무거웠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의 구속자가 되어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우리 인생항로에 선장이 되신다. 우리의 장차 가는 곳이 또한 한 방향--하나님나라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화평을 나누어주는 사람들이어야 할 것이다. 옆 사람이 지쳐있을 때, 신앙이 뭐 저 모양이냐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에게 팔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워줘야 할 것이다. 때로는 그를 부축하고 함께 길을 가줘야 할 것이다. 우리 교회에 이런 모습들이 있기를 바래본다.

‘약속의 자녀’ 이삭

                                                                     ‘약속의 자녀’ 이삭


성경구절: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2-23)


사람들은 한 번 약속한 것을 어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몇 번씩이나 다짐하였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정이 생기면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번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행하시는 분이시다. 약속을 언제 이행하실지 시기에 관하여 정한 바가 없기 때문에 참을성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 임의로 약속의 이행 때를 짐작해보다가 그때에 하나님의 약속이행이 없으면 실망하거나 포기하고 돌아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를 떠날 때, 또한 후에 하란에 머무르다가 그곳을 떠날 때, 세 가지로 그에게 약속을 주셨다. 땅의 약속, 민족의 약속, 복의 약속이 그것이다. 하란을 떠난 지 십 년쯤 되었어도 그에게 후사가 없어 아브라함은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확인시켜 주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지만 아브라함은 그의 정한 때에 후사가 없었기에 불만의 마음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아브라함은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하나님께서 밤하늘의 뭇 별들을 보여주시며 민족의 약속을 이행하실 것을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은 이를 믿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게 되었다(창 15:6).
그런 후 1-2년이 지나도 자녀가 생기지 않자 아브라함은 사라의 권유대로 하갈과 동침하고 그와의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얻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 육체를 따라 난 자녀이지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나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고 ‘사라의 몸에서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에게도 이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엎드리어 웃었다. 그리고 대답한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 17:18).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지만 20여 년이나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하매 약속 그 자체가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다. 약속을 주시되 8,000가지 이상의 많은 약속을 주십니다. 선거 때마다 정치인이 하는 많은 약속들은 거의 공약(空約)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많을지라도 반드시 이행되어지는 약속들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食言)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19)고 했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바라보고 얻기를 소망하되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약속들을 얻어야 할 것이다.

‘알지 못함’을 아는 지혜

                                                              ‘알지 못함’을 아는 지혜


성경구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한 9:41)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Know thyself)”고 말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알지 못함을 모르고 행동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해서, 모르는 것을 더욱 열심히 배워 알고자 한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71장에,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은 뛰어난 것이다(知不知上).
     모르면서도 안다고 하는 것은 병이다(不知知病).
     병을 병으로 알 때만 병이 되지 않는다(夫唯病病, 是以不病).
     위대한 사람(聖人)은 병이 없다(聖人不病).
     병을 병으로 알기 때문에 병이 없다(以其病病, 是以不病)”라고 했다.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척하는 병”이 있다. 목사의 자질이 없으면서도 목사의 자질이 ‘있는 척’ 하고, 장로의 믿음이 없으면서도 믿음이 ‘있는 척’ 하고, 권사나 집사의 믿음의 교양이 없으면서도 ‘있는 척’ 하고 있다. “척하는 병”보다 더욱 큰 문제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목사와 장로를 포함하여) 믿음과 자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줄로 여기는 착각”이란 병이다.

목사가 된 사람은 자기에게 목사의 권위와 자질이 있는 줄로 알고 있고, 장로가 된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장로가 되었는지 돌아보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장로가 될만한 믿음과 자격이 충분히 있는 줄로 알고 있고, 집사가 된 사람은 사실은 될 사람이 없어서 어쩌다 자기 같은 사람도 된 줄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자기가 집사의 자격요건이 충분해서 된 줄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척하는 병”에 걸리지 않고 “착각의 병”에도 걸리지 않은 사람이라면, 직분에 상관없이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 잘 깨달아 알 것이고, 해서 쓸 데 없는 믿음의 자랑도 하지 않고 자신을 내세우는 일은 더 더욱이 하지 않을 터인데, 그 고질적인 “척하는 병”과 “착각의 병”을 갖고 있는 탓에 “나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목에 너무 힘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께서 가장 의로운 삶을 살고 있고 모세의 율법을 아는 지식과 행함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그들의 영적인 무지를 인정하면 차라리 그들의 허물과 무지가 사함 받을 수 있었을 터인데, 그들이 (영적으로) 보지 못하면서 본다고 하니 그들의 죄와 허물이 사함 받지 못한 채 여전히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의 신앙의 삶으로부터 “체하는 교만”과 “영적 무지의 결과인, 아는 줄로 여기는 착각”을 몰아내어야 할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온전하신 은혜와 축복이 우리 가운데 풍성하게 머물기를 바래본다.


코람데오(Coram Deo)

                                                      코람데오(Coram Deo)


성경구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갈 1:20)


바울은 그의 증거가 참됨을 말할 때 '하나님 앞에서'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라틴어로는 코람데오(Coram Deo)라고 하는데, 인터넷 서점의 이름으로, 어떤 교회에서는 청년회지의 이름으로 사용될 정도로 일반화되고 널리 통용되는 용어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진실되고 바른 삶을 살아야 할 것은 우리는 마음과 말과 행동과 삶으로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언정 무소부재하셔서 모든 세상과 우리의 마음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에 손을 얹고 서약을 하고도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세상이지만, 믿는 사람들은 늘 '하나님 앞에 선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셔서, 내가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는 등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 “이 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너희에게 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고 했고, 에베소서 3장 14-15절에서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했다. 또한 로마서 9장 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11장 31절에서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고 했고, 디모데전서 2장 7절에서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우심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고 말씀한다. 바울이 이렇게 여러 곳에서 참말을 말한다고 강조함은 그만큼 그의 세대가 거짓과 진리가 구별되지 않던 시대임을 웅변적으로 대변해 주는 것이다.

어떤 무명의 크리스천 시인은 진실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성도들에게 권면한다:
    “당신이 생각할 때나, 당신이 말할 때나, 당신이 읽을 때나, 당신이 쓸 때나,
   당신이 노래할 때나, 당신이 걸을 때나, 당신이 기쁨을 구할 때나,
   집 안에서와 밖에서 모든 잘못된 것들을 피하기 위하여
     항상 하나님의 눈동자 아래에 있는 듯이 그렇게 생활하십시오.”

우리가 현재 사는 이 세상은 거짓이 만연되어 있는 곳이다. 정직한 사람이 때로는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장소이다. 참말을 말하여도 참말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여느 사람들의 거짓말과 구별되지 않고 참말이 거짓말처럼 그렇게 가볍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이다.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까?
세상사람들이 나의 말의 진정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진실을 말함으로 인하여 나에게 불이익이 돌아오고 내가 비방거리가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의 모습으로 참말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항상 코람데오(Coram Deo)--'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서있는 자의 진실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스스로 귀한 것으로 여기는 자가 되며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의 진리가 더욱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진실 되게 전파되어질 것이다.


가르치는 즐거움

                                                           가르치는 즐거움


성경구절: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갈 6:6)


  어느 날 석가모니가 영산(靈山)에서 중생(衆生)들에게 불교의 진리를 설파한다. 석가모니는 연꽃 한 송이를 들어 중생에게 보인다. 아무도 그 뜻을 몰라 잠자코 있는데, 오직 가섭 존자만이 그 뜻을 깨닫고 빙그레 미소짓는다. 석가모니는 가섭이 그 뜻을 참으로 깨달았는지 물을 필요가 없다. 깨달음은 설명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설명하고자 하면 오히려 그 진리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석가모니가 가섭 존자에게 말한다. “내게는 정법안장(政法眼藏: 올바른 진리를 갖추고 있음)과 열반묘심(涅槃妙心: 열반상태의 미묘한 마음)과 실상무상(實相無相: 변화하는 생멸의 세계를 떠난 진리)과 미묘법문(微妙法門: 진리로 가는 미묘한 길)이 있는데, 문자를 통해 표현치 않고 교리 밖에 별도로 전하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마하 가섭에게 부촉하노라.”
  가섭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뜻을 마음으로 이해한 것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이 유래되었고 또한 이 사건에서 ‘염화시중의 미소’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가섭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깨달은 것은 그의 천재성에서 기인한 까닭도 있었겠지만,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는 그의 마음의 원함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공자의 제자 중에서 뛰어난 제자의 수가 70명 정도 되었다고 한다. 그 중에 자공(子貢)은 재능(才能)이 뛰어났고, 안회(顔回)는 덕(德)과 학문(學問)이 뛰어났다.
  논어 공야장(公冶長) 편에 보면 어느 날 공자가 자공에게 묻는다. “자네와 안회 중에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가?”
자공이 대답한다. “제가 어찌 안회와 비교될 수 있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지만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아는 데 불과합니다.”
공자가 말한다. “그렇다. 자네는 안회만 못하지. 나와 자네 모두 안회만 못하다네.”
  공자가 그렇게 끔찍이 사랑한 안회는 그러나 애석하게도 41세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공자는 옹야(雍也) 편에서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그를 회상한다. “안회는 학문을 좋아했고, 화가 나도 다른 사람에게 감정을 옮기지 않았고, 잘못을 다시 반복하는 일이 없었건만 불행히도 명이 짧아 일찍 죽어 지금은 없으니, 그 외에는 학문을 좋아한다는 제자를 아직 듣지 못하노라.”

  공자가 선생으로서 사랑하는 제자 안회를 잃었을 때의 슬픔이 컸던 것은 그만큼 안회가 공자의 학문을 배우기를 힘쓰며 선생인 공자를 따랐기 때문이다. 안회가 공자의 모든 제자 중에서 학문이 뛰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달리 학문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스승이었지만 스승보다 뛰어난 제자에 대해서 시샘하기보다는 그의 학문 사랑하는 모습을 보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다. 맹자(孟子)가 말하는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가운데도 ‘천하의 영재(英材)를 얻어 그를 훌륭한 인재로 만들어 내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제자로서 우리가 연구하는 학문은 바로 주님이다. 가섭이 불교의 깨달음에 우월하고, 안회가 유교의 학문에서 뛰어났던 것같이 우리도 그리스도교의 학문에서 뛰어날 수 있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 학문의 대상인 주님을 사랑으로 대할 때 가능하다. 세상의 학문은 머리로 깨달아 진보가 있지만, 주님을 아는 학문은 가슴으로 깨달아 진보에 이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목회자에게도 귀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지는 교인들이 있는데, 목회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자 힘쓰며 그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성도들이다. 선생으로서 목회자의 역할은 다른 학문이나 예·체능계의 선생들과 다르다. 다른 분야의 경우에 선생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 주장이나 학설 혹은 기풍을 승계하여 발전시키는 일이지만, 목회자가 바라는 것은 교인들이 자기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전해지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목회자로서 나는 나의 설교를 듣고 나와 함께 성경공부를 하는 교인들이 나보다 더 그리스도를 많이 사랑하고, 더 그리스도를 아는 데(경험하는 데) 뛰어나기를 소망한다. 그리할 때, 나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즐거움이 더하리라.

인생의 사계(四季)

                                                           인생의 사계(四季)


성경구절: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塑性)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시록 22:1-2)


일년에 사계(四季)가 있듯이 우리 인생에도 계절이 있다. 봄이 있는가 하면 여름이 있고, 여름이 있는가 하면 가을이 있고, 가을이 있는가 하면 겨울이 온다. 어떤 분과 대화하는 가운데 인생의 계절(季節)을 생각게 하는 일이 있었다. 양로원(養老院)에서 노인들을 돌봐주는 일을 하고 계신 분이 “노인이 되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시는 분을 보면 저까지 낙담이 돼요. 저는 제 몸을 잘 추수릴 수 있을 때까지만 살고 싶어요” 하신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오직 하나님께 달린 것을... 더욱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삶의 계절을 주셨을진데, 우리의 처한 계절에 충실하고 그 계절의 의미를 생각하는 우리이어야 하리라.

일년의 사계(四季)와 같이 우리들은 인생(人生)에 유·소년기(幼·少年期), 청년기(靑年期), 장년기(壯年期)와 노년기(老年期)를 보낸다. 유·소년기(幼·少年期)에는 누구나 그 자신은 남들과 같은 경로를 밟아 결국은 죽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자신은 언제까지나 늙지않고 죽지않을 것처럼 생각한다. 자라기는 하되, 죽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공평(公平)의 하나님이시다. 나만이 인생의 사계(四季)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 여정(旅程)을 따라서 살게 하신다. 청년기(靑年期)에 있는 사람이 노년기(老年期)에 있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은 그도 얼마 후에는 그 길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봄, 여름, 가을과 겨울이 각각 그 나름대로 독특한 멋이 있어 지낼만하듯이 인생의 사계도 그 나름대로 독특한 멋이 있다. 다만, 일년의 겨울 다음에 봄이 오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확실(確實)한 것과는 달리, 인생의 겨울 다음에 만물이 생동(生動)하는 봄이 옴은 모든 사람에게 그리 확신 있게 보이지는 않고 소망 중에 기다려지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그러한들 우리 인생이 어찌하랴? 그것이 우리 육신의 죄(罪)로 인해 겪어야 할 과정(過程)인 것을.

육신은 비록 죄의 법으로 인해 늙고, 병들고, 죽으나, 우리의 영혼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주님의 낙원(樂園)에 들어갈 수 있음을 감사한다. 다른 사람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나로 인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겪게 하심을 감사할 수 있으면 좋으리라.

여름을 보내고 있는 청년으로서는 풍성하고 좋은 열매를 맺을 가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겨울을 보내는 분들은 인생의 겨울이 지나더라도 영원한 계절(季節)이 올 것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리라.

두발 자전거 타기

                                                                 두발 자전거 타기


성경구절: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빌레몬 1:4-6)


  성도의 신앙생활은 두 발 자전거(Two-Wheel Bike)를 타는 것과 같다. 두 발 자전거를 탈 때 페달(pedal) 밟는 일을 멈추면 자전거가 쓰러지듯이 성도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도들 가운데 믿음과 사랑의 교제하는 일을 멈추면 그 사람의 신앙은 정지하여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쓰러지고 만다. 그런데, 두 발 자전거 타는 사람은 금방 툭툭 털고 일어나서 페달을 밟으면 다시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지만, 기도와 믿음과 사랑의 교제라고 하는 페달 밟는 일을 중단하여서 쓰러진 사람은 다시 일어나서 그의 신앙의 두 발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 아니, 매우 어렵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다가 한 주일, 두 주일 거르다가 혹은 아예 몇 달, 일 년 이상을 쉬었던 사람이 다시 교회를 찾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는 경험해본 분들은 잘 알 것이다. 교회를 매주일 다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도 가운데 믿음과 사랑의 교제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이것을 처음 시작하는 일도 매우 힘들다. 그런데 이를 중단했다가 다시 재개함이 처음 시작하는 것 이상으로 힘든 것은 본인에게 왠지 쑥스럽고 가식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생활의 두 발 자전거의 페달 밟는 것을 노치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함이 필요하다.

믿는 사람의 믿음의 정진은 끊임없이 배우고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자세에서 가능하다. 나는 이만하면 됐지 하는 목회자나 성도에게는 신앙에 발전이 없다.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활모습에서나 짐승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 해서, 예수님은 “뱀의 (간교함은 빼고) 지혜와 비둘기의 순결함을 배우라”(마태 10:16)고 말씀하시고, “불의한 청지기의 (불의함이 아닌) 지혜롭게 셈하는 방법을 배우라”(누가 16:8)고 말씀하신다. 목회자나 평신도나 모두에게 신앙의 삶에 전진이 필요하다. 성경을 끊임없이 읽고 정기적으로 설교를 듣는 것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부족한 부분이 무엇이며 보다 성숙한 목회자나 성도가 되기 위하여 내게 필요한 것을 더하기 위함이다.

꿈을 간직하며 살아간 요셉

                                                       꿈을 간직하며 살아간 요셉


성경구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창세기 37:6-11)


  “꿈이 있는 백성은 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 그 꿈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살아갈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의 꿈으로 인하여서 형제들의 시기와 핍박을 받았다. 결국에는 미디안 상인에게 팔려 애굽 왕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종이 되고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의 꿈을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다. 하기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신에 하나님께 그의 꿈을 이루어 달라고 간구하였을 것이고 그러한 그의 간구가 계속되는 한 그에게는 소망이 있었고 좌절하지 않았다. 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인자를 더하시고(창 39:21) 그와 함께 하셨다(창 39:23).
그가 꾼 꿈의 실현이 현실에 비춰보면 한참 멀어져 간 그 때에도 요셉은 그 꿈을 잃지 않고 간직하였기에 방자히 행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단정하게 행하였으며,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의 때가 이르매 요셉을 높이셔서 그의 꿈이 실현되어지게 하셨다.
형들은 그의 꿈이 실현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죽이고자 했고, 구덩이에 빠뜨리기도 했고, 미디안 상인에게 팔기도 하였지만, 환경을 다스리시며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가 요셉에게 주신 꿈을 결국에 성취되어지게 하신 것이다.
꿈을 간직하며 살아가던 요셉도 일이 잘 안 풀리고 그의 꿈이 점점 멀어져만 가는 것 같을 때 얼마간은 낙담하기도 하였을 테지만 주님으로 향한 소망의 끈을 계속 부여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의 꿈이 속히 이뤄지게 해달라’고 끊임없이 간구하였을 것이다. 해서,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얻게 되었을 때, 그는 그의 모든 어려운 과정들도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었음을 입술로 시인한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형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창 45:7-8).
우리에게 꿈이 있는가? 그 꿈이 이뤄지기 위하여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할 것이다. 그리할 때 우리에게 복 주시고 긍휼을 베푸시고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꿈이 온전히 이뤄질 것이다.
잠언 기자는 “묵시(또는 꿈이나 비전)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잠언 29:18)고 말씀한다. 우리에게 꿈과 소망이 있으므로 하나님 앞에 단정히 행하여야 할 것이며, 그 꿈의 성취를 위하여 하나님께 매일매일 나아와 기도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벧엘로 올라가자

                                                                 벧엘로 올라가자


성경구절: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창 35:1)

흔히 화장실에 들어갈 때의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고 말한다. 큰 일이 닥칠 때는 급한 마음에 무엇이라도 할 것 같은데 볼 일을 다본 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서원하거나 약속한 것을 잊고 산다는 뜻이다. 그러다가, 큰 재난을 만나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가 잊고 살아가던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생각하고 허둥댄다.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약속의 말씀을 주시고, 야곱의 서원기도에 응답하여 주심으로 야곱의 이후의 일들은 (물론 약간의 어려움도 있었지만) 순조롭게 잘 풀려나갔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 머무는 20년 동안 고생한 것도 사실이지만, 레아와 라헬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베냐민은 아직 태어나기 전)과 많은 가축을 얻었다. 또 얍복 강가에서 밤이 새도록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축복을 받음으로 결국에 형 에서와도 화해를 하게 되었다(창 33장). 그에게 이제 부러울 것이 없어 보였다. 이에 그는 그가 벧엘에서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간구한 대로 그와 함께 하시고(창 28:15, 31:3), 그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고, 그로 하여금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는데,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약속 지킴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생각날 때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단을 쌓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그가 벧엘에서 한 서원을 지키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야곱과 그 일행이 세겜에 이르렀을 때, 그의 사랑하는 딸 디나가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세겜에 의하여 욕을 당한다(창 34장). 이것이 야곱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주었다. 야곱의 성급한 아들들이 하몰과 그 일가의 남자들을 죽이는 복수를 하였지만, 그 족속이 복수할까 두려워한다. 야곱은 이러한 화가 그에게 임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의 딸 디나가 철없이 이곳저곳 다니다가 화를 초래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슨 이유가 있단 말인가? 이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벧엘에서의 일을 생각나게 하신다.

창세기 35장 1절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고 하신다. 이에 비로소 야곱은 그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서원의 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해서, 그는 그의 가족과 기타 일행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창 35:3)고 말하고, 그들 중에 이제까지 간직하고 있었던 이방 신상들을 다 버리고 벧엘에 이르고 거기서 단을 쌓고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우리도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고 그에게 마땅히 드릴 경배와 찬양을 드리기 위해 벧엘(=신앙의 초심)로 올라가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믿음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믿음


성경구절: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전 2:15-16)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의 믿음”이다. 순종은 ‘믿음 이전의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8절에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그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지가 오래되었고 하란을 출발한 지도 십년이 더 지났는데 아직도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지 않음에 그의 마음에 원망이 생긴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밤하늘의 뭇 별들을 가리키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라고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은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다고 했다. 이에 창세기 15장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말씀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약속의 자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주저함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사라에게 이 일을 의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했다면, 사라의 성격상 그대로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고뇌와 고통이 없었겠는가? 아브라함이 이것이 하나님의 시험인 줄 알았겠는가? ‘나의 믿음이 어떤지 시험하시는 것일 뿐이야.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흉내만 내면 되는거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인가 중지시키실꺼야.’ 이런 계획된 짜임 속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겠는가?
아니다. 아브라함은 다만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으로 사흘 길을 행하여 모리아산에 이르고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기 위하여 그를 데리고 산을 오르고 있었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다른 것은 다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할 때 이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에서 우리는 순종하는 믿음의 결정체를 볼 수 있다. 창세기 22장 8절에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미리 가르쳐주신 대답도 아닌데 그의 순종이 그로 하여금 극한 감동을 주는 믿음의 대답을 하게 만들었다. 이는 또한 부활의 하나님을 증거하는 고백이기도 하다. 약속의 아들 이삭을 통하여 그의 후손이 하늘의 뭇별과도 같이, 바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의 자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명백한 상충(conflict)인데 아브라함은 이를 가지고 하나님께 따지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바보라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과 명령의 모순을 몰랐겠는가?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17-19절에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증언한다. 경수가 끊긴 그의 아내 사라의 나이 구십세와 그의 나이 백세에 약속의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지금 이 아들을 번제물로 취하신다고 하더라도 그의 언약을 이루실 분이심을 순종의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바람의 고백은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였다. 이 믿음의 고백이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시게 했겠는가? 얼마나 하나님을 감동시키셨겠는가? 요즈음도 이러한 고백을 우리가 할 수 있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로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창세기 22장 12절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극박한 목소리로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기쁘심과 만족하심이 이 말씀 가운데 가득히 담겨져 있다.

익명의 구제, 익명의 봉사, 익명의 헌물

                                          익명의 구제, 익명의 봉사, 익명의 헌물


성경구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태 6:1-4)

얼마 전부터 교회 주보에 내던 헌금자 명단을 생략하였다. 몇몇 분이 주보에 헌금자 명단을 싣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목회자로서 개인적으로도 헌금자 명단을 빼는 것이 좋을 듯하여서 의논한 끝에 그리 한 것이다. 질문을 제기한 분들은 좋은 뜻으로 그리 하셨을 줄 믿는다. 헌금의 종류대로 이름이 열거되기에, 체면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내는 헌금이 아까워서, 혹은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헌금을 하지 않음이 부담스러워 ‘헌금자 명단을 주보에서 빼는 것이 좋지 않으냐’고 말씀한 분은 없을 줄 안다.
얼마 전에 어떤 큰 교회 주보에 실린 헌금자 명단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헌금을 한 주일학교 어린이들의 이름까지 깨알같이 작은 글자로 실려 있었다. 그 주보를 보면서, 헌금자 명단을 주보에서 빼기를 잘하였다고 생각했다. 어떤 목사님들은 ‘헌금자 이름을 주보에 실어주면 헌금이 늘어난다’고 말한다. 우리 교회의 주보에서 헌금자 명단을 뺀 이후에 헌금의 액수가 줄었는지, 아니면 오히려 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의 드리는 헌금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종교기관인 교회에 내는 것이 아니라 (물론 세금보고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나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전에 학원사역을 할 때, 참으로 열심으로 봉사하는 학생이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하는 헌신의 몇 배의 헌신으로 기독학생회(Korean Christian Fellowship)를 위해서 수고했으나,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노력하고 헌신한 것에 대해 언급하거나 감사하지 않으면, 전혀 딴 사람이 되어 한 구석에 물러나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교회의 일을 우리가 열심히 감당하고 나 자신을 헌신할 것은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남이 나를 인정해주고 칭찬하면 할수록 나는 하늘의 상급을 잃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1절). 그렇다면, 오히려 다른 사람이 나의 한 일에 대해서 칭찬해주지 않음이 좋지 않은가?!

우리의 구제나 봉사나 헌신이나 헌물은 남의 인정함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나?’ 체면치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넉넉하게 할 것이며, 나를 인정하시고 나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구제와 봉사와 헌신과 헌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의 왼손이 모르는 오른 손의 구제요 봉사이지만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은 아시고 기뻐하신다.

교회 안에서의 질서

                                                            교회 안에서의 질서


성경구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秩序)대로 하라.” (고전 14:33-40)

이민교회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모든 교파의 사람들이 한 데 모여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장로교회나 감리교회나 침례교회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교회 안에는 여러 다른 교파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다. 한 도시에 존재하는 한인교회의 수가 제한되어 있으므로 감리교회의 배경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그 도시에 존재하는 감리교회의 목사님이 마음에 들기가 그리 쉽지 않고, 장로교회의 배경을 가진 사람에게도 그 타운에 하나밖에 없는 장로교회 목사님의 설교가 마음에 맞기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파위주로 교회를 선택하기보다는 목사님을 보고, 혹은 주일학교 교육에 따라, 또는 사람들과의 이해관계에 따라 교회를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교회를 선택하여 다니기는 하지만 그 교회의 행정, 정책결정, 운영방식이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다. ‘내가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이런 일은 이렇게 결정했는데, 이 교회는 왜 저렇게 하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해서, 이의를 제기하게 되고, 하다가 목소리가 커지면 교회에 소요가 일게 되기도 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사람처럼 행동하라”(Do as the Romans do in Rome)는 말이 있다. 참으로 명언이다. 기왕에 미국에 살고 있으면, 미국문화 속의 불만스러운 것들과 한국문화 속에 극히 제한적으로 좋아하던 것들과 비교할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 살 때는 미국사람처럼 미국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미국사회 속에 있는 장점들을 보려고 해야 할 것이다.
장로교회를 다니기로 결정하였으면 장로교인처럼 행동하고, 감리교회에 다니기로 작정하였으면 감리교인처럼 행동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현재의 것과 과거의 것을 비교할 때, 과거의 것 중에 만족했던 사안과 현재의 것에 불만스러운 사안을 비교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부정적인 자세가 교회 내의 질서를 어지럽힐 수도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고전 14:33) 질서와 조화와 화평의 하나님이시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솜씨를 생각해본다. 우주의 수천 억이 넘는 항성들이 어떻게 운행하는지 살펴보자. 정교한 궤도를 따라 질서와 조화있게 운행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질서와 조화를 원하신다. 교회 내의 질서와 조화는 나를 주장하지 않고, 나의 감정과 왜곡된 생각에 따라 상대방을 판단함으로 오해하지 않고, 교우들을 이해하고자 하고 자신을 낮춤으로써 이뤄지는 것이리라.

Tuesday, April 10, 2012

모든 것의 때

                                                                      모든 것의 때

성경구절: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전도서 3:1-8)

   요즘 한창 선거의 일로 미국과 한국에서 정치인들이 바쁘다. 그들은 이번이 그들이 원하는 자리에 도전하기에 좋은 때인지 분주하게 계산해 본다. 의욕이나 욕심이 앞서다 보면,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은데도 출사표를 던지는 수가 있다. 어떤 사람은 한국축구의 열기를 기회 삼아 대권경쟁에 나서고, 어떤 사람은 심(沈) 모라는 여류 무속인이, "이번 대선에서는 해와 달을 성으로 가진 사람(明 씨)이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라."고 하였기에 대권에 도전하기도 한다 (본인은 반드시 그 이유 때문은 아니라고 하지만).

   바둑을 두다 보면, 아직 대국의 초반인데도 불구하고 승리의 가망성이 없는 필패(必敗)의 판임을 알 때가 있다. 해서, 그 대국을 포기하기 위하여 돌을 던질 때를 찾으면서 한 수, 두 수 두지만, 어느덧 던질 때를 놓쳐버리고 무의미한 반상 메우기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을 보면, 초읽기에 몰리면서까지 끈기 있게 붙잡고 늘어짐으로 질 것 같은 바둑을 이기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관전자의 눈으로 보기에는 별로 불리한 것 같지 않은데도 40-50 수만에 돌을 던지는 경우도 본다. 그러나, 그가 분명히 고수(高手)임을 고려한다면, 그는 돌을 끝까지 붙잡고 늘어질 때와 돌을 던질 때를 잘 알고 그러한 결단을 내리는 것이리라.

   크리스천으로서 나의 삶에 있어서 결단의 때는 어떻게 알 수 있나?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잣나무로 방주를 지을 것을 명하신다(창 6:14). 하나님께서 장차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인데 너와 네 가족은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신다. 방주를 지으라고는 하셨는데 언제 홍수를 내릴 것이니까 몇 년 안에 완성해야 한다고는 말씀하지 아니 하셨다. 아마 처음 방주 짓기를 시작하였을 때 노아에게는 이렇게 큰 방주를 지으려면 몇 년이나 걸릴 것인지 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방주를 짓되 100년의 세월을 걸려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치수의 방주'(창 6:15)를 완성하였다. 40일 밤낮으로 계속 내리던 비가 그치고 서서히 마른 땅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노아는 방주에서 언제 나가야 할 것인지 그 때를 헤아리기 시작한다. 백 오십 일이 경과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잠잠하시기만 하다. 이 백 일이 지났는데도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까마귀를 내 보내고, 또 비둘기를 날려보낸다. 비둘기가 감람 새 잎사귀를 물고 옴을 보고 땅에서 물이 줄어들었음을 알게 된다. 다시 비둘기를 내어놓으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땅이 말라 거할 자리가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잠잠하시기에 나가기가 주저된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으로 임하신 것은 그로부터도 한 두 달이 더 지난 다음인--즉 하늘의 창들을 여시고 비를 내리기 시작하신지 일 년하고도 십 일이 더 경과된 다음이었다(창 8:14). 하나님이 노아에게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과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창 8:15-17) 말씀하시매,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모든 육축과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다(창 8:18-19).

   믿음으로 때를 기다리는 인내와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때를 아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너무 조급하여 때가 오기 전에 행동할 것도 아니요, 너무 태만하여 때가 왔는데도 그냥 지나쳐버릴 것이 아니다.“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秩序)대로 하라” (고전 14:33-40).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성경구절: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야고보 3:1)

어떤 목사님이 점점 유명해지거나 높이 올라가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님을 원숭이에 비유해서 말한 적이 있다. 원숭이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땅에서만 활동하고 나무 위로 올라가 뛰어다니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원숭이의 엉덩이가 빨간색인지 하얀색인지 잘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원숭이가 다른 동물들보다 높은 곳에 올라가 뛰어다니는 것을 즐기는 바람에 그 못생긴 엉덩이가 사람들과 다른 동물들 앞에 훤히 보여지는 것이다.

사람이 그저 낮은 자리에서 또는 평범한 지위에 있을 때는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적고 해서, 그의 치부가 드러나는 일이 거의 없는데, 국무총리, 장관, 혹은 대통령 후보가 되면 드러나지 않던 ‘원숭이 엉덩이’ 같은 치부(恥部)가 드러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들의 비리를 들춰내고 목청을 높여 비판하는 사람들 중 사실 상당수가 더 많은 비리와 더 더러운 치부를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일진대 이건 정말 아이러니(irony)라고 할 것이다.

작은 교회를 목회하는 무명의 목사는 교회 안에서는 그에 대한 신인도가 어떠할지 모르지만 대외적으로는 무난한 목사이다. 그러나 교회가 점점 커지면서 그의 이름이 나기 시작하고 잘 나가는 목사가 되면 시샘과 공격의 대상이 된다. 전에는 발견되지 않던 문제점들이 어찌 그다지도 많은지... 어떻게 그런 사람이 목사가 되었는지 모를 지경이다.
한참 잘 나가던 지미 스웨거트 목사나 짐 베-커 목사가 작은 목회를 하고 있었다면, 과연 그들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 있었을까? 물론, 목사에게 포르노나 여자 문제는 금물이지만, 그들이 작은 교회의 목사였다면 그들을 감시하는 눈도 적었을 것이요, 혹 그들의 비행이 발견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요란스럽게 비판을 받고 매장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주위에서 ‘그 목사가 이랬대, 저랬대...’ 하다가 사그라졌을 것이다. 그들이 목사가 아니었더라면, 물론 그들을 비난하는 목청은 더욱 적었을 것이지만.
한국교계를 대표하는 지도자라고 여겨지던 두 목사의 문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한 목사는 여성 신도들을 대한 그의 부적절한 행동이 문제가 되었고, 다른 한 목사는 박사학위 논문 표절이 문제가 되고 있다. 목회자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인가? 그들이 현 한국교계를 대표하고 있는 큰 교회의 목사가 아니었더라면, 교회 안에서 잠깐 논란이 되다가 시들해졌을지도 모를 일이 그들이 너무 높이 올라가있는 관계로 그들의 치부(恥部)가 많은 사람들 앞에 드러나고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듯하다.
해서, 예수님의 육적 형제 야고보는 우리들에게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야고보 3:1)고 역설적 권면을 하신 것이리라.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동이 참으로 중요하다. 이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 띄는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의 삶이 그들보다 나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더 문제 투성이라고 여겨지면, 믿는 사람은 그의 삶으로는 믿지 않는 사람을 평생 교회로 인도해 올 수가 없다.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는 것에서 지나서 직분자가 되면, 더욱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집사야??’ ‘저렇게 삶에 진실함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권사야??’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세상일에 악착같고 걱정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장로야??’ 하며 사람들은 뒤에서 혹은 대놓고 비난을 한다. 이는 비난하는 사람들의 믿음이나 삶이 비난의 대상이 된 집사나 권사나 장로나 목사의 삶보다 낫기 때문이 아니다. 그 직분자가 (믿음이나 삶에서) 그들의 눈높이 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의 믿음과 삶의 흠이나 실수가 그들의 눈에 보여지기 때문이다.

믿는 사람들, 특별히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자기의 믿음과 삶을 돌아봄이 필요하다. 첫째는, (전도의 대상인)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책잡힐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이며,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우리의 믿음을 견고히 하고 삶을 돌아봄이 매일의 신앙생활 가운데 있어야 할 것이다.

깨진 독에 물을 채우라

                                                               깨진 독에 물을 채우라


성경구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


오래 전에 ‘달마야 놀자’라는 영화의 비디오를 빌려 본 적이 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자 불교계에서 지지하고 관람을 권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2000년 언제인가 한국에서 조폭(=조직폭력배)에 관한 영화가 정말 예상외로 흥행에 성공을 거뒀는데 (친구, 조폭 마누라 등등), 이 ‘달마야 놀자’라는 영화도 조폭을 주제로 하였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인데, 특이한 것은 야간업소나 유명무실한 건설회사나 유령회사가 아닌 산사(山寺)가 그 조폭영화의 촬영현장이라는 것이다.

조폭 간의 싸움에 패한 다섯 명의 폭력배들이 경찰들의 눈을 피해 산사로 들이닥치면서 그곳에서 스님들과의 갈등이 시작된다. 머물기를 강청하는 폭력배들의 거친 행동 때문이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로써 주지스님은 그들에게 일주일 머물 것을 허락하는데, 일주일이 지난 다음에도 폭력배들은 떠날 생각을 안하고(떠날 수 없는 이유가 발생하지만) 더 머물게 해달라고 막무가내로 졸라댄다. 해서, 그들을 못마땅히 여기는 스님들과 조폭 간에 내기를 벌이게 되고 내기에 지는 쪽이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약속한다. 부처님께 3천 배 올리기, 고스톱, 물 속에서 오래 견디기, 3-6-9 게임을 한 결과 승부는 2대 2로 조폭과 스님들이 팽팽하게 맞선다. 서로 떠나라 못 떠나겠다 티격태격할 때, 주지스님이 승부를 가름하는 문제를 낸다. 즉, 깨진 독 두 개를 사찰 마당에 준비하고, “깨진 독에 물을 채우라”고 지시한다. 신발 짝으로 깨진 부분을 막으려고 해보기도 하고, 사람의 배 위에 독을 뒤집어놓고 물을 채우려고 시도도 했지만 이 방법 저 방법이 다 여의치 않고 제한된 시간은 다 되어간다. 이때 갑자기 폭력배들의 우두머리(박신양 분)가 독을 들고 따라오라고 지시하고 그들을 데리고 간 곳은 물이 제법 고여있는 개울가이고, 그는 부하들에게 그곳에 독을 던지라고 소리친다. 그런 후에, 물로 뛰어들어서 독을 물 속으로 누르니 깨진 독에 물이 채워지고 또 넘쳐난다. 주지스님(김인문 분)은 이를 보며 “물이 철철 넘치는구나”라고 환한 미소를 짓는다. 바로 이것이 그의 선문(禪問)과도 같은 질문에 대한 모범 답이었던 것이다.

깡패들은 주지스님이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줌에 대한 보답의 뜻으로 법당 안을 청소하는데, 그러다가 부처상의 귀를 떨어뜨리고 만다. 말썽만 부리는 그들에게 화가 난 스님들은 이 일을 주지스님에게 고하면서 그들을 내보내지 않은 결과가 이것이라고 주지스님을 몰아세운다. 그러나, 주지스님은 법당의 부처의 상은 그저 상(icon)일뿐 그것이 ‘참 부처님’은 아니라고 설파한다. 부처님은 각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고 말한다.

얼마 후에 그 우두머리가 주지스님에게 ‘왜 우리에게 이렇게 잘 대해 주느냐?’ ‘스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착한 일을 하라든지 남을 괴롭히지 말라든지 바라시는 것이 있지 않느냐?’라고 묻는다. 이때 주지스님은 “그럼 너는 밑 빠진 독에 물을 퍼부을 때 어떤 생각으로 그것을 채웠어?”라고 질문하고, 우두머리는 “전 그냥 항아리를 물 속에 던졌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에, 주지스님은 “나도 밑 빠진 너희를 그냥 내 마음 속에 던졌을 뿐이야”라고 대답한다. 여기에 달마대사를 그 태두(泰斗)로 하는 선불교의 핵심 사상이 들어 있다. (이 선불교의 사상은 부처와 그리스도가 대체된 2세기 영지주의 기독교의 사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주지스님의 대답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부족한 모든 인생들에게 주시는 대답이기도 하다.

우리 ‘밑 빠진 독’과 같이 부족한 인생은 우리의 능력과 수고로는 물과 같은 성령을 우리 안에 가득 채울 수가 없다. 채운 것 같으면 어느새 우리의 내면 적인 죄의 속성으로 인하여 좌절하고 갈급해 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따름이다. 우리는 우리를 ‘그냥’ 하나님의 은혜의 강으로 던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강으로 풍덩 뛰어들 때 우리는 비로소 ‘밑 빠진 독과 같은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되는지’ 알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의 어떠한 노력과 금욕적인 삶도 우리의 죄와 허물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지 못하며, 우리는 여전히 곤고하며 매마른 심령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발견할 뿐이다. ‘밑 빠진 독’과 같은 우리에게 성령의 물을 가득 채우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지혜가 있기를 바래본다.
다윗은 시편 23편 5절에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넘쳐흐르는 주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을 했는데, 이것이 주님의 넘치는 은혜 속에 사는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마음의 눈을 밝히라

                                                               마음의 눈을 밝히라


성경구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1:17-19)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21-23절에서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눈은 ‘마음의 눈’이다. 이 눈이 탐욕스러우면, 우리의 몸도 탐욕으로 가득 차게 된다. 마음의 눈이 어둡고 병들어 있으면 육신의 몸도 병들게 된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밝으면 우리의 육신도, 영도 밝음을 체험한다.

신수라고 하는 중이 몸과 마음에 대하여 한 편의 시를 벽에 써놓았다.

        몸은 보리나무요, 마음은 그 앞에 서있는 밝은 거울과 같다.
        항상 거울을 깨끗이 닦아서 먼지가 그 위에 붙지 않게 하라.

부처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곧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항상 마음을 깨끗이 하는 수련을 계속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이를 본 혜능이 또 한 편의 시를 그 옆에 쓴다.

        예전부터 보리나무도 없었고 밝은 거울도 서있지 않았노라.
        본래부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니 어디에 먼지가 붙으리요?

신수는 정결한 마음을 갖기 위해 도를 닦는 것이 부처가 되는 깨달음의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혜능은 ‘무심(無心)’이 부처의 길이라고 대답한다. 선과 악을 생각하는 마음 자체를 없애는 것이 부처가 되는 길이라는 것이다.

선불교에서는 악을 생각하는 것이 제일 아래요, 선을 생각하는 것이 그 다음이요, 제일 위의 것, 곧 부처가 된 사람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를 위해 그들은 일생을 좌선하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깨달음의 경지에 스스로 도달할 수 있고 이때 시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하지만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 인간은 연약하여 결코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스스로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성령께 더욱 의지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마음이 아니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생각하는 선한 마음이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다. 이 눈은 영의 눈인데 성령께 온전히 의탁할 때 비로소 열릴 수 있다. 우리 마음의 눈은 신수가 말한대로 마음을 깨끗게 하고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우리 가운데 영접하며 그분께 나의 중심을 드리는 결단의 순간으로써 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아 알아서 더욱 믿음이 견고해지기를 원하신다.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성경구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브리서 11:1-2)


물질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있는데 비본질적인 외형을 구성하는 요소를 accident라고 하고 본질적인 실체를 구성하는 요소를 substance라고 한다. 그 물질을 그 물질처럼 보이게 하는 것--곧, 형태, 맛, 색깔과 냄새등은 accident이다.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성찬식 때 이 포도즙과 빵의 accident는 그대로 있지만, 실체 곧 substance는 변형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된다고 한다. 즉,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먹고 마시는 사람들은 비본질적인 외형--곧 허상으로서는 여전히 빵과 포도즙이지만 이를 먹고 마실 때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實狀)”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 실상을 영어성경은 substance(KJV) 혹은 assurance(RSV)라고 번역했다.

한 물질의 외형이 accident라고 했다. 이 외형은 비본질적인 요소이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이것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화를 내고 슬퍼하고 또는 즐거워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우연하게 혹은 돌발적으로(accidentally) 닥아오는 환경이나 고난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다만 비본질적인 요소일 뿐이다. 따라서 이것으로 인하여서 우리의 믿음이 시험을 받거나 넘어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비본질적인 환경과 조건 속에 내재하시는 우리 믿음의 본질, 본체이신 주님을 발견하여야 한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주님을 바라봄으로 각기 다른 환경 가운데서도 감사가 넘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에는 나의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 환경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원망을 발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다스리심을 이해하고 경험한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이라고 비본질적인 여건 가운데서도 본질적인 실재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감사와 기쁨을 돌려드린다.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가 그 대표적 예이다. 그는 유다나라가 갈대아인의 침공을 받고 예루살렘이 훼파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심히 두렵고 마음에 분함마저 생긴다. 유다가 하나님의 백성인데 설혹 약간의 악행과 불순종이 그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 아닌 더 악독한 갈대아인을 들어서 심판하실 것이라니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나? 하박국은 강한 불만과 분을 발하며 하나님께 항의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긍국적으로 악인에 대한 심판과 어려운 상황 가운데도 믿음을 지키는 의인에 대한 구원의 계획을 이해한 하박국은 하나님께 기쁨과 찬양을 돌린다. 하박국 3장 17-19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비본질적인 현상인 환경과 조건을 이기는 절정적인 믿음의 고백을 바울의 로마서 8장 35-39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우리의 실패와 부족이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하며,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우리를 고통스럽고 두렵게 하여 우리의 믿음을 없애고자 하며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하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다함 없는 본질적인 사랑에 대한 확신으로 여전히 감사와 즐거움이 넘쳐난다.

‘은혜받았습니다’의 의미

                                                            ‘은혜받았습니다’의 의미


성경구절: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딤후 4:3-4)


어떤 목사님이 자신의 경험을 말씀한다. 이 분이 큰 교회 전도사로 재임하던 중 모처럼 기회를 얻어 주일 저녁예배 설교를 맡게 되었다. 그 전도사님은 천 명이 넘는 교인들 앞에서 설교할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 말씀을 잘 전하기 위하여 열심히 설교준비를 했다. 고린도전서 8장을 갖고 크리스천의 경제윤리를 설교하고자 준비하는데 한 장로님의 얼굴이 자꾸만 설교준비의 길을 막는다. 그 장로님은 자그마치 빌딩 아홉 채를 소유하고 땅도 상당하여 당시 개인소득세 납부 실적이 한국 전체에서 10위안에 드는 분이었다.
그 전도사님은 처음에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제윤리를 말씀 그대로 설교하고 싶었지만 그 장로님이 부담이 되어 결국 우회적인, 변죽을 울리는 설교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속으로 이르기를, 그 장로님이 설교내용의 속뜻을 깨닫고 아홉 채 빌딩과 땅의 얼마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았다.
  설교를 마친 전도사님께 부자 장로님이 다가오며 말을 건넨다. “전도사님, 오늘 설교 참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아니 젊은 전도사님이 어떻게 설교를 그렇게 잘 하십니까?” 하면서 기쁜 낯으로 악수를 청한다. 그러나 기실 그분이 은혜 많이 받았다고 한 것은 전도사님을 통한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기 소유의 일부를 나누어줄 생각이 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설교를 듣고 보니, 장로님의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의 해석으로는 재산을 그대로 갖고 있는다고 해서 크게 죄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전도사님의 설교가 그분의 귀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 많은 재산을 계속 보유해도 좋다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에 은혜로 생각된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삶 가운데 부담으로 생각되는 것에 관해 설교 듣기를 원한다. 가려운 귀를 그대로 두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다. 누가 시원하게 긁어주기를 원한다. 전혀 언급이 없으면 그것을 갖고 사는 것이 계속 부담으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에 관한 설교를 듣고자 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보다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그것이 죄가 아니요, 허물이 아니라는 해석을 듣기 위해서이다.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아는 한 아이가 있다.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시는 것 같은데 야단치지 않으시면 계속 불안한 가운데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것에 관하여 “얘야, 그건 잘한 일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괜찮은 일이야.”라고 하시면 마음이 홀가분하다.
설교를 듣는 사람은 대개 자신이 가책을 받는 부분에 대해서 설교를 듣기 원하지만, 말씀을 통해 지적받기보다는 잘못된 것 같다고 여겨지는 부분에 대해서 괜찮다는 대답 듣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만일 목사님이 괜찮다고 말해 준다면, 설교를 통해 ‘은혜받았다’고 여기게 된다.

이 일에 대해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3-4절에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니라”라고 말씀한다. ‘귀가 가렵다’고 하는 표현은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잘못된 것처럼 여겨지는 부분이 자기 삶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 잘못된 부분을 도려내야 할 터인데, 그러자니 너무 아깝고 잃어버리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해 줄 설교자를 구하되, 그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둔다고 했다. 즉, 직언해 줄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듣기 좋은 소리를 해 줄 사람 두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하루는 부자 청년 관원이 예수님께 찾아왔다(마가 19:16-22; 막 10:17-22). 그 사람이 왜 예수님을 찾아왔겠는가? 그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계명들을 잘 지킨 사람이다. 그러나 그 마음에 여전히 한 가지 부담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에게 재산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그에게 늘 부담거리가 되던 중 영생에 관한 가르침을 전한다고 하는 예수라는 선생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리하여 예수를 만나서 그분의 변호를 듣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가 듣기를 원했던 대답은, “당신에게 재산이 많아도 괜찮습니다. 당신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계명들을 잘 지켜오지 않았습니까? 지금의 권세와 부귀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당신은 지금 이 모양 그대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는 대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참으로 직설적(直說的)이다. 그가 이것만은 피했으면 했던 문제를 적나라하게 지적하신다. 성경은 이것이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으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막 10:21). 그때 부자 청년 관원은 어떻게 했나?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 10:22)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나의 허물을 고치지 않아도 좋다는 말씀을 듣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지 않으신다. 만일 설교자가 ‘그래도 좋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 말씀의 강한 뜻을 변경하여 하와를 미혹한 옛뱀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구하지 않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만 구하는 자가 된다.

사람들의 죄와 허물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는 회개하지 않은--뉘우치고 고치지 않은--죄와 허물을 들추어내지 않고 덮어두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한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는 것이요 기억지 않으시는 것이다.

‘여자’라는 이름

                                                                     ‘여자’라는 이름


성경구절: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1-15)


셰익스피어(Shakespeare, 1564-1616)의 희곡 햄릿(Hamlet)을 보면, “Frailty, thy name is woman! (약한 자여, 너의 이름은 여자로다!)” 하는 대사가 있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 그의 부왕이 죽은지 한 달도 채 못되어 모친 게투르드(Getrude)가 부왕을 독살한 그의 숙부 클라우디우스(Claudius) 품에 안기는 것을 보고 절망하여 외친 말이다. 여기서 ‘약한 자’로 번역된 frailty는 신체적 약함이라기 보다는 ‘유혹에 빠지기 쉽고, 도덕관이나 절개가 허약함’을 뜻하는 것이다.

사단의 대리자인 옛뱀이 먼저 이브에게 접근한 까닭도 여자가 남자보다 더 유혹에 빠지기 쉬웠던 까닭이었다. 남자는 먼저 흙을 취해서 만들어 모양에서는 덜 곱고 투박하지만 유혹에는 잘 넘어가지 않는데, 여자는 남자의 귀한 부분이요, 뼈중에 뼈인 갈비뼈로 만들어서 그 모양은 더 아름답고 섬세하지만 대신에 미혹에 넘어가기 쉬운 단점이 있었다. 하나님은 여자를 창조하시되 더 아름답고 좋은 작품으로 만드셨는데 여자는 선악과 한 개로 인하여 그 우위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우위성을 상실할 뿐 아니라 일생을 남자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도록 운명지어지게 되었다.

바울은 이러한 여자의 실수로 인한 지위의 격하에 대해서 디모데전서 2장 11-15절에서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한다.

하와와 아담의 타락 후에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내리신 징벌을 보면, 창세기 3장 16절에서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시고, 3:17에서 “아담(=남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두 절을 비교해보면, 여자에게 내려진 징벌이 남자에게 내려진 것보다 더 가중함을 알 수 있다.

범죄함 없이 여전히 에덴동산에 있었더라면 해산의 고통없이 다른 방법으로 아마도 하나님께 청하여서 원하는 만큼의 자식을 얻을 수 있었을터인데, 해산의 고통과 함께 자식을 낳게 되고 남편의 다스림을 받는 처지로 낮아졌다. 그리하여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쫓겨난 후 남자와 여자는 때로는 서로 미워하며 대립하는 관계가 되며, 때로는 그러면서도 서로 그리워하며 결합하기를 원하는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하나님의 그들을 향하신 뜻은 그러나 여전히 그들이 서로 도울 배필이요, 서로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창세기 2장 24절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고 말씀하는데 이는 육체적·정신적인 결합을 통하여 그들의 애정을 확인하는 것 이상의 커다란 창조의 섭리--주님과 하나되는 비밀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권투선수 에반더 홀리필드 이야기

                                                 권투선수 에반더 홀리필드 이야기


성경구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3)


1996년 11월 9일에 에반더 홀리필드(Evander Holyfield)와 마이크 타이슨(Mike Tyson)간의 권투시합이 벌어졌는데 경기 전에는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던 것이 그 경기의 의외성(意外性)과 홀리휠드의 개인적 간증거리로 경기이후 한동안 젊은 사람들과 목회자들간에 이야기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경기가 열리기 전에 전문가(25-1)나 비전문가 할 것 없이 마이크 타이슨의 일방적인 승리를 예상했는데, 결과는 의외로 홀리휠드가 11회전에서 TKO승을 거두었다.
경기후 인터뷰를 하는데 홀리휠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뿐이었다. 경기후 “Jesus is Lord"라고 새겨진 모자를 쓴 홀리휠드는, “God is good! God is good!"을 연발하면서, “I give all my glory to God. With God on your side, you can do the things you choose to do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편에 계실 때, 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어떠한 일도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경기를 하러 나올 때도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란 구절이 적힌 옷을 입고 나왔다.

에반더 홀리휠드가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전향할 때는 꽤나 기대되는 건방진 유망주였지만 사람의 기대에는 못미치는 편이었다. 얼마 후에는 심장까지 나빠져서 권투선수로서의 삶을 마감해야할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던 그가 베니 힌(Benny Hinn) 목사를 만나게되고 베니 힌 목사의 안수를 받고 그의 심장이 나음을 얻었다고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병나음으로 인하여 그의 믿음이 확실하여지고 그는 그와 함께 하여주시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승리케하여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홀리휠드는 경기 전부터 이미 예정된 승리를 바라볼 수 있었고, 이미 승리가 예정된 경기를 함으로서 승리를 얻었다. 그래서 경기후에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찬양할 수 있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번 경기를 마이크 타이슨의 모슬렘과 에반더 홀리휠드의 기독교의 싸움이었고 결과는 기독교의 승리였다고 논평하기도 했다.

이 경기가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고등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어떤 고등학생을 둔 아버지는 예수 믿으라고 그렇게 오래 권해도 듣지 않던 아들이 홀리필드의 경기를 보고는 즉시 예수 믿기로 작정했다고 간증했다.

에반더 홀리휠드는 경기전부터 승리할 것을 미리 알았다고 했다. 우리 모두 그와같은 간증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예정된 과정(course)을 따라 살아가고 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결국은 승리로 끝날 것이다.

우리가 밤 하늘에 빛나는 별빛을 보는데, 우리가 지금 보는 별빛은 그 별을 떠난 지 몇만 광년, 혹은 몇십만 광년이 지난 것이다. 우리가 보는 그 빛은 이미 몇만 년 전 혹은 몇십만 년 전에  우리에게 보여지기로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천상의 전쟁(heavenly war: 12장)과 지상의 전쟁(earthly war)이 묘사되어있는데, 하나님께 대항한 사단의 세력은 이미 천상전쟁에서 패하여 내어쫓긴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전쟁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그 결국은 천상에서의 전쟁의 복사판이며 정해진 과정을 마치고 하나님의 군대의 승리로 끝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인승 자전거 타기

                                                               이인승 자전거 타기


성경구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인생 여정을 살아가는 것을 자전거 타기에 비유(比喩)할 수 있다.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 일을 중단할 때 자전거가 쓰러지는 것같이 인생에서 삶의 동작을 중단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을 때 나는 혼자 일인승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내가 타고있는 자전거는 평탄한 길이나 내리막길을 갈 때는 별 어려움 없이 잘 달린다. 그러나 오르막길을 오르기는 참으로 힘에 벅차다. 장시간 쉬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에게는 평평한 길도 힘에 버거워지기 시작한다.

  믿음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이제 일인승 자전거가 아니라 이인승 자전거를 타고 간다. 그리스도가 뒤에서 페달을 밟고 나는 앞에서 핸들을 조정하며 페달을 밟고 달린다. 내가 그리스도께 바라는 것은 단지 나의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 나를 도와 달라는 것이다. “내가 알아서 내 길을 갈 테니까 주님은 다만 나를 도와 페달을 열심히 밟아 주시고 내가 나를 위해서 정한 목적을 이루게 해주세요.”하고 명령에 가까운 부탁을 한다.

  그러나 뒤에서 나를 도와 묵묵히 페달을 밟아주시는 그분이 나보다 더 강하시고 지혜로우시고 갈 바를 잘 아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우리는 이 사람을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고 부른다--기꺼이 앞자리를 그리스도께 양보한다. 자신은 뒷자리에서 페달을 밟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앞자리로 옮겨 앉으신 그리스도께 목적지까지 잘 인도해 달라고 요청한다.

  내가 핸들을 잡고 있을 때 나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주님께서 핸들을 잡으신 다음에는 그분이 왜 이 길로 자전거를 몰고 가시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  주님은 짖궂으셔서 때로는 가파른 산길과 돌투성이의 자갈길로 자전거를 몰고 가신다. 그리고 무서워서 어쩔줄 몰라하는 나를 뒤돌아보시며 한 눈을 찡끗 하신다. 주님은 자전거 타기의 명수이시다. 처음에는 주님의 자전거 타는 솜씨가 어떨지 몰라 불안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이제 주님이 핸들을 몰고 가시는 그 길을 즐길 수 있다. 나 혼자라면 엄두도 못 낼 험한 산길을 주님과 함께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산길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여유가 내게 생긴다.

  뒷자리에서 페달을 밟는 내가 이 길은 불가능하다고 느낄 때도, 이제는 지쳐서 도저히 더 갈 수 없다고 판단할 때도 주님은 미소를 지으시며 “힘들면 페달 밟는 일을 조금 쉬어도 좋아. 내가 네 몫까지 할 테니까.” 하시며 힘차게 페달을 밟으신다. 주님은 참으로 강하고 믿음직스런 분이시다.

건강하게 나이 드는 비결

                                                               건강하게 나이 드는 비결


성경구절: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 4:16)


몸은 늙었어도 건강하고 활기찬 삶을 사는 비결이 있다. 시편 기자는 92:14-15에서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바위시라. 그에게는 불의가 없도다”라고 하며 나이드는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에 장애요인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을 포기하고 있는가가 문제이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어머니는 67세의 나이에 평화봉사단 자원자를 뽑는 TV 광고를 보고 자원하여 인도에서 2년간 봉사를 했다. 그는 평소에 카터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능(才能)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카터는 대통령으로서는 그렇게 큰 빛을 발하지 못하였지만 크리스챤으로서는 귀감(龜鑑)이 될 만 하다. 최근에 ‘노령의 미덕’이란 책을 출간하기도 한 그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은퇴 이후 더욱 보람있고 빛나는 삶을 살 것을 권고한다. 그는 그의 책에서 “은퇴이후 생활의 기쁨은 일주일에 골프를 몇 차례 치는데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일에 도전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데 있다.”라고 하며 노인들이 생을 다할 때까지 무언가 의미있는 일에 자신을 투자할 것을 강조한다.

카터가 생에 대한 강력한 도전정신을 갖고 활동하는 비결은 철저한 기독교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독실한 침례교 신자인 카터는 청년기인 해군장교 시절부터 주일성경학교 교사를 했는데,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워싱턴의 한 교회에서 가끔 성경을 가르쳤고, 대통령 퇴임 후에는 그의 모교회인 조지아주 플레인스 마을의 마라나타 침례교회에서 주일마다 성경학교 교사의 직무를 계속해 나간다. 그는 “믿음은 나를 활력있게 만드는 최대의 원천이라”고 했습니다. 유능하고 수완이 좋은 대통령이 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더욱 중요한 일은 성실하고 한결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리라.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朽敗)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 말씀한다. 나이 드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허락하신 순리일진데 육신의 늙음은 우리로서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우리의 심령은 성령의 역사하심과 도우심으로 늘 강건하고 새로워질 수 있다. 매일 새로워지는 우리의 속사람으로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과 기도로 대화하고,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를 사모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내리신 기력이 쇠하지 않는 축복을 우리에게도 내리실 줄로 믿는다.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성경구절: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 4:15-16)


서당에서 훈장님이 아이들을 가르친다: “자, 너희들 나를 따라 해봐라.” 그리고, 천자문을 읽어 나갑니다. ‘바람 풍(風)’ 자를 하는데, 아무래도 학생들이 자신을 따라서 하는 것같지 않다. 그래서, 훈장님이 다시 한 번 반복한다: “바담 풍風).“ 아이들도 큰 소리로 따라서 합니다: “바담 풍(風).” 훈장님은 “바람 풍(風)”도 제대로 발음할 줄 모르는 학생들을 향하여 화가 난다. 한 아이, 한 아이 시켜보지만, 하나 같이 “바담 풍(風)” 한다. 회초리를 들고 “바람 풍(風)” 자도 제대로 따라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종아리를 때린다. 몇몇 아이들이 참다 못하여 훈장님께 아뢴다: “훈장님이 바담 풍(風), 바담 풍(風) 하셨잖아요?” 훈장님은 비로소 자신의 혀가 짧아서 “바람 풍(風)” 자를 “바담 풍(風)”으로 밖에 발음하지 못하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아이들을 향하여 야단을 칠 때, “이 녀석들아, 나는 ‘바담 풍(風)’ 하더라도, 너희들은 ‘바담(실은 바람) 풍(風)’ 해야지”하며 소리를 지른다. 나는 잘못 발음하더라도, 아이들은 제대로 발음하기를 원하는 것이 학생들을 사랑하는 훈장님의 마음이다.

순자(荀子)의 「권학(勸學)」편에 “청출어람청어람(靑出於藍靑於藍)”이란 말이 있다. “푸른 빛(靑)은 쪽빛(藍)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뜻이다. 이를 줄여서 흔히 “청출어람(靑出於藍)” 또는 출람(出藍)이라고 하는데,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가 스승보다 더 뛰어날 때 쓰는 말이다.

고사(古史)를 보면, ‘공번’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밀’의 스승이었으나, 몇 해 후에는 ‘이밀’의 학문이 ‘공번’을 앞질렀기에 공번은 자진하여 이밀의 제자가 되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함이 진보를 이루는 기본이요, 나는 부족함이 없다고 스스로 여기는 사람은 항상 그 모양으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제자를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스승은 ‘제자가 학문적으로 자기를 추월하여 앞질러 가는 것을 시기(猜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한다.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지만, 교인들 중에 그보다 더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고, 더 기도 많이 하고, 더 주님을 사랑하고, 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신실한 삶을 살아간다고 해서 그 교인을 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할 수만 있으면, 모든 교인들이 그로부터 하나님 말씀을 전해 듣고, 크리스천이 마땅히 살아가야 할 도리에 대해서 배우지만, 그보다 앞서 나아가기를 바란다. 그리할 때, 그러한 교인들은 그의 참 자랑거리가 된다.

자녀들이 자라면서 가정에서는 부모로부터, 학교에서는 스승으로부터 이 사회를 사는데 필요한 것을 배우는데, 부모와 스승--“월급쟁이 스승”의 차이점이 있다. 물론, 진정한 스승은 부모와 같은 마음이요 입장이다. 부모와 진정한 스승은 그 아이가 잘못을 할 때 지적해주고, 때로는 야단도 치며, 심하면 매를 들기도 한다. 그 아이를 지적하고, 야단치고, 때림이 그 아이를 미워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음을 안다. 그 아이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심하게 대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미운 아이에게는 떡 하나를 더 주고, 사랑하는 아이에게는 매를 한 대 더 준다”는 속담도 있지 않는가? 그러나, 월급쟁이 스승이나 삯군 목자는 세상의 학문을,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기는 하지만, 그것을 듣는 학생이, 교인이 어떠하든지 상관이 없다. 따라오면 따라오는 것이고, 말아도 그만이다. 세상의 학문이든, 예수 그리스도이든, 지식의 전달자로서 가르쳤으니 그만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그들이 듣고 따라오면 그들이 잘 되는 것이고, 안 듣고 안 따라오면 그들이 망하는 것이니 내 알 바 아니라는 생각이다. 궂이 그들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해서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육신의 아비는 아니지만 그들을 때로는 얼르고 때로는 야단을 침은 그가 그들의 영의 아비가 되기를 원한 때문이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처음 가르친 것이 바울이고, 할 수만 있으면 그들 모두가 상급이 있는 크리스찬들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씀할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한다.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할 때, 바울의 무엇을 본 받는 자 되라는 것인가?
--그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본 받는 자 되라고 한다.
--그가 이제까지 그의 생에서 중요하다고 여겼었던 모든 세상 것들을 분토(糞土)만도 못한 것으로 여겨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을 알기로 작정한 것을 본받는 자 되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 마음 밭에 받아 열매를 맺되 풍성한 것으로 남기고, 영에 속한 자로서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사모하는 그 마음을 본 받는 자 되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청하여 미련하고 약하고 비천한 자 됨을 본 받는 자 되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수고하고,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는 그 생활모습을 본받는 자 되라고 한다.
-그 위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누지 않고 하나가 되고자 하는 바울의 희생과 사랑의 마음을 본 받으라고 말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