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6, 2013

금욕주의와 하나님


금욕주의와 하나님

성경말씀:  “이런 것들(=금욕주의와 세상의 초등학문)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 2:23)

주전 300년부터 유행하던 스토아 철학(Stoicism) 속한 사람들은 쾌락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극단적인 금욕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들의 금욕은 하나님 밖에서 그들 철학의 선을 이루기 위한 인간적인 노력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편에서 믿음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2세기 영지주의자들(Gnostics) 중에 일부(Saturninus 대표적) 마르시온주의자들(Marcionites) 금욕의 삶을 살았다. 그들은 크리스천을 자처하던 이단들이었는데, 그들이 금욕의 삶을 것은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의 아버지, 절대적인 신은 우주와 인간을 창조한 , 소위 데미우르고스(Demiurgos) 라고 하는 신과는 다른 신이라는 그들의 신학에 근거한 것이다.
데미우르고스가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고 자식을 갖게 것은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그들을 영원히 분리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그들을 만든 신이 데미우르고스인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논리 속에 있는 절대적인 신에게 귀의하기 위하여 데미우르고스의 다스림을 받는 것을 거부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데미우르고스가 축복하는 결혼, 자녀증식과 고기 먹는 것을 금하고 철저한 금욕의 삶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창조자를 대처한 그들의 머리 속에 존재하는 신은 다만 허상(虛像) 그들에게 축복을 주는 신은 되지 못하였다. 그들은 크리스천이라고 스스로 칭하였지만, 창조주 하나님 밖에 머물고자 했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을 체험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마르시온(Marcion) 금욕을 요구하는 삶이 사람들에게 종교적이요 경건하게 보였는지, 마르시온의 교회와 교인수가 2세기 한때는 정통교회의 교세를 능가할 정도였다.

중세 수도원 생활을 하는 신부들과 수녀들이 금욕적인 삶을 살고자 힘썼다.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이런 삶을 산다고 말하였지만, 안에 적지 않은 불륜의 문제가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안에 있던 대신에 카톨릭의 계율 안에서 부자연한 종교행위를 까닭이다.

경건한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금욕적인 삶이 좋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좋게 보이는 경건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규율이나 율법이나 자신의 신학에 속박되는 금욕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며 신앙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금욕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 밖에서 행해지는 금욕은 신앙의 성장과는 무관하며, 하나님 안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행하는 금욕은 그의 경건에는 전혀 무익한 것이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사람이 음행의 잘못을 범하기 쉬우므로 그러면 차라리 장가들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이 좋겠다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했다. 이때 예수님은 11-12절에서, “사람마다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도 있도다.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기로 결단하는 것은 좋은데, 이것을 지킬 만할 때에 지키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결혼은 하지 않았는데, 마음 속에 정욕의 마음이 불같이 일어날 이를 억지로 (밖으로 나타내지 못하고) 참는 것은 결혼함만 못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7 1-2절에서너희의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권고한다. 성도의 가정이 신앙성장의 좋은 훈련장소가 되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