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pril 11, 2012

산 제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산 제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성경구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사무엘상 15장 22절에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신다. 호세아서 6장 6절에서도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제사나 번제를 별로 좋아하지 아니하시는구나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왜 이 말씀을 하시며 그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은 청종치 않고 명령에는 불순종하면서 제사와 번제를 드림이 못마땅하시기에 사무엘을 통하여 이 말씀을 하게 하셨다. 북방 이스라엘이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섬김이 없이 베델과 단에 마련한 ‘금송아지 여호와’에게 제사와 번제를 드리기에 그것들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슨 마음으로 어떠한 제사--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있는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며 순종할 마음이 우리 가운데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드리는 예물과 예배를 기뻐 받으실 것이다.

시편 51편 16-17절에서 다윗은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 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 하시나이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별로 아쉬움이 없이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구분됨이 없이 드려지는 번제나 제사는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다윗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제사는 형식이 아니라 제사드리는 사람의 심령(=마음)이라고 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되 통회하고 자복하는 심령으로--하나님 앞에 온전히 자신의 모든 죄와 허물을 드러내는 마음으로 나아오는 자를 기뻐 받으신다는 뜻이다. 예배를 드리러 나아오는 사람이 구분됨이 없고 정성이 담기지 않은 예물을 드릴 때 그 예물을 물리치시고 회개함이 없이 드리는 그의 기도와 예배를 기뻐 받지 아니하신다. 그러나, 동일한 예배장소에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통회하고 자복하는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꿇는 사람의 예물과 예배는 기뻐 받으시며 응답해 주신다. 다윗은 계속하여 51편 19절에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제사와 모든 번제를 원치 아니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모든 제사와 모든 번제를 원하시는 분도 아니시다.
하나님은 “의로운 제사”와 “온전한 번제”를 원하신다.
“의로운 제사”가 무엇일까?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심령으로 자기의 죄를 자복하여 하나님의 죄사함을 체험한 사람이 의로운 자이며 그가 드리는 제사가 “의로운 제사”이리라. 하나님 앞에 여전히 거북스럽고 해결되지 않은 관계를 갖고 나아오는 사람은 “의로운 제사”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온전한 번제”가 무엇인가?
“온전한 번제”는 구분되고 정성이 듬뿍 담겨있는 예물이리라. 자기 자신이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림은 “온전한 번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말라기서에서 왜 하나님은 유다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드리는 제물에 대해서 “너희가 나의 단을 더럽게 하였다”(말 1:7)고 말씀하시는가? 그들이 드린 제물이 눈먼 것과 저는 것과 병든 것(말 1:8)--찌꺼기 같은 것으로 여호와의 단에 드렸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번제--예물은 (사람이 사용하기 이전에) 구분된 것이며, 사람도 귀히 여기는 것이며, 마음의 정성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왜 아벨과 아벨의 제사는 열납(悅納)하셨는데, 가인과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아니하셨을까? 아벨은 양의 새끼로,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아벨에게는 구분됨이 있었고 가인에게는 구분됨이 없었다.
아벨은 양의 새끼들 가운데 첫 번째 새끼를 정성스럽게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라’고 구분하여 드린 반면에, 가인은 농산물의 모든 산출이 ‘다 내 것인데’ 그 중에 얼마를 그저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주일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전에 나아와 거룩하고 온전한 예배드림이 성도의 마땅히 행할 바이다. 주일날 교회에 나오기 전에 자기의 세상일을 하다가 허둥지둥 시간에 쫓기며 교회에 올 것이 아니다. 교회로 향하기 전에 충분한 여유시간을 갖고 하나님께 묵상기도하고 성경을 몇 장 읽는 것도 경건하고 온전한 예배에 임하는 사람의 바른 자세일 것이다.
주일예배에 나오는 옷차림도 바른 것이어야 한다. 외양을 중시여기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차림새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마음이 담긴 차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이나 주지사를 만나는 자리에도 청바지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에 청바지를 입고 나와도 좋으리라. 그러나, 대통령이나 주지사를 만나러 가는 자리에는 정장의 옷들 중에서도 제일 좋은 옷을 골라 입으면서, 아니 갖고 있는 옷들 가운데 마땅히 입을만한 옷이 없다고 고급의 옷을 구입하여 입으면서, 하나님을 만나러 나올 때는 아무렇게나 대충 입고 나온다면 이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세상의 주지사보다 못하시거나 아예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다.

성도에게 온전하고 구분된 주일예배 드림이 참으로 귀하고 중요한 것이 사실이나 더 귀하고 중요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그의 삶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권고하고 있다. 여기서 성도의 몸(σώμα)은 그의 전부--삶 그 자체를 의미한다. 주일날 거룩하고 온전한 예배는 드렸는데 그의 삶이 주일예배의 거룩함을 뒷받침 하여주지 못한다면 이는 “거룩한 산 제사”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의 삶--“영적 예배”의 삶이 아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거룩을 본받는 자의 삶이 되어야 하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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