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pril 11, 2012

최고의 지혜

최고의 지혜


성경구절: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는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1:7)

장자(壯者) 내편(內篇) 대종사(大宗師)에 보면, “하늘이 하는 일을 알고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사람으로서 최고의 지혜에 도달한 사람이다. 하늘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자연 그대로 살아가고,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그의 지식이 아는 바를 가지고 그의 지식이 알지 못하는 바를 키워 나가니, 그렇게 타고난 수명을 다하면서 중도에 일찍 죽어버리지 않는 사람은 바로 지혜가 훌륭한 탓이다”고 했다. 여기서 장자(壯者)의 하늘은 옥황상제, 혹은 하나님이라기보다는 자연 또는 천지만상의 조화에 가까운 뜻이지만,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이라고 해석해도 뜻이 잘 통한다. 곧,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고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사람으로서 최고의 지혜에 도달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그러한 사람은 없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은 모르더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뜻은 헤아려 알려고 노력하고 알지 못하더라도 말씀에 따르는 순종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있나 하면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고있다. 그 이유는 사람이 하는 일의 의도도 이해할 수 없고,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은 더욱 깨달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를 혼란케 하며 또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성도로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때로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하나님을 잘 믿고자, 경건한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는데도 이 세상에서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다닌다고 하지만 윤리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못한 삶을 살아가는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축복해주시는 것 같음이 우리를 속상하게 하고 혼란스럽게 한다.

하나님이 잘 믿는 사람들에게는 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다 확실하신 세상 축복을 내려주시면 그 하나님을 잘 믿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사람들의 이러한 바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계신지 안 계신지 묵묵무답(黙黙無答)이시다. 그래서, 교회 안에 하나님의 일을 참으로 열심으로 자신의 일보다 더 돌보는 사람들을 찾기가 힘들다. 믿음을 갖되,  할 수만 있다면, 구원에 간신히 턱걸이 할 정도의 믿음만 갖기를 원한다. 이 세상 삶이 끝난 다음에나 있다고 하는 하나님의 칭찬이나 상급은 받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믿음이 과연 구원 받을만한 믿음인가?
구원 받을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죄사함과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으며 소망 중에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은혜를 베푸신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를 원하며 몸이 따라가든 따라가지 못하든 주님의 일을 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친히 인도하시며 돌보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셨지만 이스라엘의 믿음이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었으며 그들의 생활이 하나님을 위하여 진정으로 헌신하는 것이었나?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그렇지 못했음을 발견한다.
그들 가운데 분명히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공급하여 주시고 옷과 신발이 닳지 않게 하셨는데, 어찌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그렇게 불신과 불경건의 모습으로 살아갔는가?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없음이 문제가 아니요, 인간 마음 가운데 항상 도사리고 있는 교만이 문제이다. 그 교만이 일이 되어짐의 과정과 종국을 결정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이 사람의 판단대로 되어지지 아니할 때 이 미련한 인간은 지혜의 하나님을 향하여 불신(不信)의 원망을 발하고 하나님을 부인한다.

하나님이 항상 인간의 예상대로, 바람대로, 공평의 원칙대로 행하셔야지만 ‘참 하나님’이 되시는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모습을 보이실 때나 보이시지 않을 때나 소수의 믿음의 사람들이 존재해왔다. 이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을 낮추어 절대주권의 하나님과 그의 말씀 앞에 항상 순종하기를 원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의 순종은 하나님을 항상 잘 이해하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모습을 밝히 보기에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기에, 나의 뜻이 그분의 뜻과 다를 때에라도 그가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믿기에, 지금은 나의 형편이 고통과 슬픔이어도 그가 결국에는 나를 평안과 기쁨으로 인도하실 것을 알기에 그 말씀에 순종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세상 형편이 되어짐을 보면서 하나님을 얼마만큼 믿어야 할 것이며 하나님의 일은 얼마만큼 감당하여야 할 것인가 계산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미련한 지혜자’를 원하신다. 미련한 지혜자는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미련하게 보이나 하나님의 눈으로는 순종의 믿음이 있는 지혜자이다.
구약의 노아의 예를 본다. 그는 당시를 산 세상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였다.
하나님께서 내가 정확히 얼마 뒤에 세상을 멸하시겠다고 미리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다만 그에게 “세상 끝날이 이르리니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지으라”(창세기 6:14)고 명하셨다.
노아가 커다란 방주를 지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조롱하고 웃음꺼리로 삼았다. “이 미련한 놈아 왜 이 쓸 데 없는 일을 하느냐?”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보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방주를 지어갔다. 때로는, 가족들도 그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이 살던 곳이 바닷가도 아니고, 하늘이 청청하기만 한데 이 방주는 무엇에 쓸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노아 자신도 때때로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고 마음 속에 의문을 던지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백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 결과가 무엇인가?
당장은 고통이요 답답함이지만, 묵묵히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며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미련한' 우리가 되기를 바래본다. 

 

 

죄(罪)의 기원(起源)

죄(罪)의 기원(起源)


성경구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이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6:1-3)

그리스 신화(神話)에 등장하는 불의 신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하늘의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전해 주었다는 이유로 신들의 신 제우스(Zeus)의 노여움을 사서 카프카스(Caucasus) 산의 바위에 묶였다가 결국에는 독수리에게 간과 내장을 파먹혔다고 한다. 그보다 앞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와 인간들을 벌하기 위하여 판도라(Pandora: 그리스 신화, 인류 최초의 여자)에게 상자를 들려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보냈는데 그 상자의 뚜껑을 열었더니 온갖 해악이 나오고 상자 속에는 희망만이 남아 있었다고 했다. 이것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보는 해악과 절망, 인류 불행의 기원이라 할 것이다. 이 죄악의 기원이나 그리스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신과 인간간의 사랑이 독창적인 것 같지만 기존에 있었던 성경 속의 ‘죄의 기원’을 빌어서 변형시킨 것에 불과하다.

유대인들은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온 경위를 세 가지로 설명한다. 이 세 가지 중 둘은 성경에 나오는 내용이다. 첫째 설명은, 정경(正經)에는 나오지 않고 위경(Pseudepigrapha) 중 하나인 에녹2서에 나온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근원적 태초, 하늘 위의 하늘에도 하나님 이외에 아무 존재가 없을 때와 창세기 1장 1절의 천지창조의 태초 사이에 하나님께서 하늘에 천사들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임무를 맡기셨다. 그들 중 대천사(archangel)라고 하는 직분이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직분으로서 이조시대 임금의 명령을 전하는 도승지에 해당한다.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기 위해서 성경에 등장하는 미가엘, 가브리엘 등도 이에 속하는 천사들이다. 그 대천사 중 하나인 루시퍼(Lucifer)라고도 하는 사타나일(Satanail)이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다보니까 나중에는 자신의 권능이 마치 하나님만큼이나 되는 줄 착각하고 다른 천사들을 부추겨서 하나님께 대적하였다가 패하여 공중으로 내쫓김을 당하게 된다.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이 사타나일에게도 은혜를 베푸셔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공중의 권세를 그에게 주신다. 유대인의 지혜서 탈무드는 창세기 1장 하나님의 여섯 날 동안의 창조 중 둘째 날에만 “보시기에 좋았더라”란 말이 빠진 까닭을 이와 연관시켜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이 궁창 하늘--곧 공중의 권세를 사타나일에게 주실 것이기에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며 흡족해 하지 않으셨다고 해석한다. 천사의 타락이 인간 타락의 빌미가 되었다.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된 두 번째 설명이 이어진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사단의 다른 형태(agent)인 옛뱀이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하는 사건이다. 하와만 먹었을 뿐 아니라 아담도 함께 먹음으로써 둘이 선악을 구분하게 되었고, 그들의 벌거벗음을 보고 부끄러워하였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을 두려워하여 숲속에 숨는다. 선악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일 때는 죄 짓는 일이 적었는데, 인간이 선악(善惡)을 알면서부터는 선을 행하려 하지 않고 선으로부터 먼 악을 더 행하게 된다. 믿는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 일을 하는 대신에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고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더 행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바울은 이를 ‘죄의 법’이라고 했다. 로마서 7장 19-21절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罪)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한다.

셋째 설명은 노아의 홍수로부터 백이십 년 전의 사건으로서 창세기 6장에 그 개략이 나오고 위경서 중 에녹1서(1-36장)에 그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6장 1-2절에,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라고 했다. 에녹1서의 설명에 따르면, 세미아즈(Semyaz)와 아자젤(Azazel)이라고 하는 대천사의 지휘 하에 하늘나라 200명의 파수 천사들이 하늘로부터 지상을 굽어 내려다보니 사람의 딸들인 여자들이 아름다우매, 그들과 결혼하고 그들에게 화장하는 법을, 또 세상의 남자들에게는 전쟁하는 법을 가르침으로써 악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설명한다. 창세기 6장 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肉體)가 됨이라.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믿음의 사람 노아에게 백 년에 걸쳐서 방주를 만들게 하셨다. 백 년의 시간을 주신 것은 노아의 순종을 보시기 위함이기도 하였지만, 그간에 혹시 ‘인간들이 그들의 패역에서 돌이킬까’ 기대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함을 아시기에 창세기 6장 5-6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고 했다.

죄가 인간 세상에 들어와 번진 것은 마치 잉크 한 방울이 맑은 물이 담긴 병에 떨어진 것과 같다. 검은 잉크 한 방울은 처음 떨어진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곧 물병 전체에 번져서 물병의 물을 다 검게 만들어 버린다. 물병을 흔들 때 그 번지는 속도는 더욱 빨라서 삽시간에 물이 검게 변한다.

의심의 안개 걷히고

의심의 안개 걷히고


성경구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진리에 대한 갈구가 있는 사람은 그 진리를 만나는 순간 희열(喜悅)을 느낀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진리를 발견하는 비결은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학문은 ‘의심의 눈,’ ‘비판의 눈’을 갖고 있어야 발전이 있지만, 믿음에는 이러한 것이 장애요인(障碍要因)이 된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시내를 내려다보면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맑은 날 엠파이어스테이트(Empire State) 빌딩이나 씨얼스(Sears) 빌딩 꼭대기에서 뉴욕이나 시카고 시를 내려다보면 그 도시의 모양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안개가 낀 날은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가서 시내를 내려다보아도 그 모습을 헤아려 알 수 없다. 안개가 짙으면 짙을수록 더욱 보기가 어렵다. 우리의 눈이 의심이나 교만이나 욕심의 안개로 가려져 있을 때 우리는 보기 원하고 발견하기 원하는 믿음의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는 이미 목사로 안수 받고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조지아(Georgia)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제대로 선교하지 못하고 세월만 허비하다가 어느 날 밤중에 도망치다시피 하여 영국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배의 갑판에 서있는 그의 마음에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가 있었다. 폭풍이 배를 뒤흔들 때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때, 같은 배에 타고 있던 모라비안 교파의 크리스천들이 부르는 찬송소리가 들렸다. 그 찬송이 웨슬리의 마음을 평안하게 했다. 그는 생각에 잠긴다. ‘나는 목사인데도 이렇게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운데, 저 사람들은 어떻게 이 풍랑 속에서도 저렇게 평안할 수 있을까? 동일한 예수님을 믿는데 왜 나에게는 저런 기쁨과 평안이 없을까?’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 채 그는 목사로서의 사명을 생각하며 번민했다. 어느 날 그는 런던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거리를 걷고 있다가 조용한 찬송이 흘러나오는 교회의 문을 들어섰다. 무명의 목사가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었다. 이를 듣고 있던 웨슬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믿음의 진리를 발견한 그는 그 작은 교회 한 구석에 앉아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을 다녔고 대학 시절 홀리 클럽(Holy Club)을 조직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었다. 25세의 젊은 나이에 이미 엥글리칸(Anglican) 교파의 목사로 안수받은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트 목사였지만 이전까지 그에게는 구원의 기쁨이 없었다. 그는 머리로만 크리스천이었지 가슴에는 신앙이 없었다. 그의 나이 35세에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는 체험으로 말미암아 그는 감리교의 창시자가 될 수 있었다.

요한 웨슬리를 거듭나게 한  「로마서 강해」를 쓴 루터는 16세기 독일 신부 출신의 종교개혁자이다. 그가 아직 신부로 있을 때 그의 마음은 평온이 없었다. 아무리 고행을 해도 죄사함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로마에 있는 성당의 계단을 팔꿈치와 무릎으로 기어서 오르락내리락 해도 죄는 여전히 자신 안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그러던 그에게 한 말씀이 들어왔는데 로마서 1장 17절이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로써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단행할 수 있었다. 우리의 구원은 선한 행동과 고행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요, 면죄부를 사는 것으로도 아니요, 오직 우리의 구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한 깨달음은 일찍이 바울의 깨달음이기도 하다. 바울은 바리새파에 속한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했지만, 그에게는 죽음 앞에서 집사 스데반이 누렸던 기쁨과 평안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는 인간의 구원이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귀히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고 그에게 영원한 생명과 기쁨을 주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도로 변화되었다.

마음을 열어주는 찬송들

마음을 열어주는 찬송들


성경구절: “너는 예루살렘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ת)하라.” (에스겔 9:4)

찬송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 준다. 같은 찬송이지만 전에는 내가 감동을 느끼지 못했는데, 어떤 특별한 상황 가운데 동일한 찬송을 들을 때 그 찬송을 통하여서 성령께서 나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강한 감동을 주시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다. 오래 전의 이야기다. 장로교단의 노회 모임에 참석했는데, 시간 중에 한국인 2세로서 미국장로교 총회 대표단에 참여하여 북한을 방문하고 오신 K 장로님의 북한 방문 보고를 듣게 되었다. 그는 뉴욕에 있는 한 대학교에서 미생물학을 가르치고 있는 분인데 그가 보고하는 북한 실정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이미 다 아는 것이라 별 흥미거리는 아니였으나 보고 마지막에 그분이 북한 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곳 교인들과 같이 불러 은혜를 받았다는 찬송가 410장이 나를 사로잡았다. 체구가 왜소하신 장로님이 피아노를 직접 치며 찬송을 부르기 위해 건반에 손을 얹는다. 그분의 세련된 전주에 마음이 쏠리기 시작하고 그가 1절과 4절을 한국어로 찬송할 때 그가 북한 교회 교인들과 함께 이 찬송을 불렀을 장면이 연상되어 내게 한없는 성령의 감동이 임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주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곳도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공산정권의 독재 가운데 있을 때고, 세상이 주는 슬픔과 고통 중에 있을 때도 우리가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쓸 데 없던 자이던 나를 사랑하셔서 구속하시고 구원해 주신 까닭이다.

한국에서 아직 평신도로 신앙생활을 할 때 교회학교 부장으로서 교사들과 아이들과 함께 신체 장애-지진아 보육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들의 표정은 어두웠으며 우리 일행의 방문을 조금도 반기는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소외당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음을 굳게 닫고 있던 보육원 아이들이었는데 우리가 진정으로 그들과 대화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열었을 때 그들의 그늘지고 일그러진 표정 뒤에 감추어져 있던 아름다운 속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둘러앉아 함께 찬송하고 경험한 주님의 사랑을 서로 간증했다. 찬송과 대화로 시간가는 줄 모르다가 헤어질 때쯤 되어서는 그대로 떠나기가 아쉬워 그들을 다음 주일 저녁예배에 교회로 초대하여 특송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때 그들이 부른 찬송은 세상의 어떤 유명한 합창단의 노래보다도 아름답고 은혜스럽게 내 귀에 들려왔다.

        죄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 둘 수 없도다.
        오 주님 같은 친구 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으네
        나는 이 세상에 정 둘 수 없도다

그들의 찬송에 눈시울이 뜨거워옴을 느꼈다. 이 세상에서는 형제와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소년, 소녀도 있었다. 그들의 마음속에 주님이 함께 하시며 사랑의 손으로 고통받는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계시리라. 예수님은 바로 저들에게 처소를 예비해 주시기 위해 하늘로 먼저 올라가신 것이다.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올 때 쯤에 선교사가 되고자 하는 결단을 하고 기도하는 중에 나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은 찬송이 404장이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찬 404장 1, 3절)

나같이 무익하고 죄많은 인생까지 구원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워 그 사랑을 돌려드리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고 찾고 그 일을 증거하고 감당하고자 할 때 이것이 찬송을 통한 진정한 은혜요 감격이다.

버지니아에서 대학원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때, 찬송가 한 곡이 미국에 와서 주님을 처음 믿기 시작한 한 대학원생에게 격렬한 감동을 주었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 뿐일세

        나의 사모하는 선한 목자는 어느 꽃다운 동산에
        양의 무리와 늘 함께 가셔서 기쁨을 함께 하실까

        나의 진정 사모하는 예수여 음성 조차도 반갑고
        나의 생명과 나의 참 소망은 오직 예수뿐일세(찬 82장 1, 2, 5절)

부부 모두가 서울 문리대 생물학과를 나왔는데 아직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기도 전에 주님께서는 성령의 강한 감동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그의 창자까지 시릴 정도로 느끼게 하였다. 요란한 집회에서가 아니라 이제 성경을 공부하기 위하여 조용히 준비찬송을 하는데 그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으셨다. 그 감동이 얼마나 컸던지 그는 그것을 주체할 수 없어 했다. 그가 이제 시작하여 1년이 지난 그 공부가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 그에게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듯 보였던지 어느날 나에게 상담을 청하였다. 밤새도록 그 부부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강하게 체험하여 일생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한 사람이라도 왜 여전히 학문을 계속함이 필요한지 설득하였다. 후에 그는 장로가 되었고 부부가 모두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같은 학교의 강단에서 가르치고 있다고 들었다.

찬송을 통하여 우리가 성령의 감동 가운데 사랑과 은혜를 접하게 되지만, 그러나, 찬송이 우리 신앙생활의 긍극적인 목적이 되지는 않는다.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 문을 여는 한 방편이다. 그러므로 겸손하고 열린 심령으로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더 잘 알고자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오합지졸 이스라엘의 승리

오합지졸 이스라엘의 승리


성경구절: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이 민족들이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낼 수 있으리요 하리라마는 그들을 두려워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라.”(신 7:17-18)

두 명 이상의 선수들이 팀을 이루어서 경기를 하는 스포츠 종목은, 골프나 테니스 복싱 등 개인 스포츠와는 달리,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의 스타 플레이어(star player)가 있다고 하더라도 좋은 전적을 올리지 못한다. 팀에 소속된 선수들이 팀을 위하여 열심히 뛰고 이기겠다는 의지로 경기에 임할 때 좋은 전적을 거둘 수 있다. 알렉스 로드리게스(Alex Rodriguez)가 텍사스 래인저스(Rangers)에 있었을 때에는 그의 탁월한 공격력과 수비력에도 불구하고 만년 꼴찌를 면치 못하더니 그가 뉴욕 양키스(Yankees)로 옮긴 올해에는 오히려 월등하게 공격력과 성적이 좋음을 본다. 이는 스타플레이어가 없는 것이 팀웍이나 팀 케미스트리(Chemistry)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미국프로야구(MLB: Major League Baseball)에 소속된 팀들 전체를 볼 때에도 팀 연봉 총액이 낮은 팀들이 높은 팀들보다 좋은 성적을 거두는 예들을 종종 본다. 작년에 우승을 차지한 플로리다 말린스(Marlins)도 비교적 낮은 연봉의 팀이지만 선수 연봉 최고의 팀인 양키스를 누르고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말린스(Marlins)라고 하는 팀을 구성하고 있는 젊은 선수들이 마음을 같이 하고 투지를 불사를 때 놀라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용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팀’의 흥함과 쇠함도 이러한 세상의 이치가 적용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분명히 오합지졸의 모임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오합지졸이었기에 오히려 더 잘 뭉칠 수가 있었고, 각자의 힘을 의지하기보다는 모세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고자 하였다. ‘고라’라고 하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을 때에는 그가 사사건건 모세와 아론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었는데, 하나님이 그와 그를 추종하는 자들을 죽이실 때(민 16장) 오히려 단결이 잘되었다. 그들은 분명히 훈련받지 않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자 하는 동일한 목적을 갖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때 그들이 광야를 행진하면서 만나는 이방나라의 군대들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었다.

교회의 성장과 쇠함에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 사람들이 자기의 주장과 잘남을 드러낼 때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다만 잠잠하실 따름이다. 성도들의 마음 속에 계신 성령은 그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사람에게 그를 도우실 보혜사(Helper)가 되신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학식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오래 거하는 사람이나 잠시 머무는 사람이나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소속감을 갖고 주님의 지상명령인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동일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 오합지졸임을 자처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볼 때, 이러한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나타나고 성장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있다.

산 제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산 제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성경구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 12:1)


사무엘상 15장 22절에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신다. 호세아서 6장 6절에서도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제사나 번제를 별로 좋아하지 아니하시는구나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왜 이 말씀을 하시며 그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은 청종치 않고 명령에는 불순종하면서 제사와 번제를 드림이 못마땅하시기에 사무엘을 통하여 이 말씀을 하게 하셨다. 북방 이스라엘이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섬김이 없이 베델과 단에 마련한 ‘금송아지 여호와’에게 제사와 번제를 드리기에 그것들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슨 마음으로 어떠한 제사--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있는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며 순종할 마음이 우리 가운데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드리는 예물과 예배를 기뻐 받으실 것이다.

시편 51편 16-17절에서 다윗은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 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 하시나이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별로 아쉬움이 없이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구분됨이 없이 드려지는 번제나 제사는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다윗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제사는 형식이 아니라 제사드리는 사람의 심령(=마음)이라고 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되 통회하고 자복하는 심령으로--하나님 앞에 온전히 자신의 모든 죄와 허물을 드러내는 마음으로 나아오는 자를 기뻐 받으신다는 뜻이다. 예배를 드리러 나아오는 사람이 구분됨이 없고 정성이 담기지 않은 예물을 드릴 때 그 예물을 물리치시고 회개함이 없이 드리는 그의 기도와 예배를 기뻐 받지 아니하신다. 그러나, 동일한 예배장소에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통회하고 자복하는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꿇는 사람의 예물과 예배는 기뻐 받으시며 응답해 주신다. 다윗은 계속하여 51편 19절에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제사와 모든 번제를 원치 아니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모든 제사와 모든 번제를 원하시는 분도 아니시다.
하나님은 “의로운 제사”와 “온전한 번제”를 원하신다.
“의로운 제사”가 무엇일까?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심령으로 자기의 죄를 자복하여 하나님의 죄사함을 체험한 사람이 의로운 자이며 그가 드리는 제사가 “의로운 제사”이리라. 하나님 앞에 여전히 거북스럽고 해결되지 않은 관계를 갖고 나아오는 사람은 “의로운 제사”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온전한 번제”가 무엇인가?
“온전한 번제”는 구분되고 정성이 듬뿍 담겨있는 예물이리라. 자기 자신이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림은 “온전한 번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말라기서에서 왜 하나님은 유다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드리는 제물에 대해서 “너희가 나의 단을 더럽게 하였다”(말 1:7)고 말씀하시는가? 그들이 드린 제물이 눈먼 것과 저는 것과 병든 것(말 1:8)--찌꺼기 같은 것으로 여호와의 단에 드렸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번제--예물은 (사람이 사용하기 이전에) 구분된 것이며, 사람도 귀히 여기는 것이며, 마음의 정성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왜 아벨과 아벨의 제사는 열납(悅納)하셨는데, 가인과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아니하셨을까? 아벨은 양의 새끼로,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아벨에게는 구분됨이 있었고 가인에게는 구분됨이 없었다.
아벨은 양의 새끼들 가운데 첫 번째 새끼를 정성스럽게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라’고 구분하여 드린 반면에, 가인은 농산물의 모든 산출이 ‘다 내 것인데’ 그 중에 얼마를 그저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주일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전에 나아와 거룩하고 온전한 예배드림이 성도의 마땅히 행할 바이다. 주일날 교회에 나오기 전에 자기의 세상일을 하다가 허둥지둥 시간에 쫓기며 교회에 올 것이 아니다. 교회로 향하기 전에 충분한 여유시간을 갖고 하나님께 묵상기도하고 성경을 몇 장 읽는 것도 경건하고 온전한 예배에 임하는 사람의 바른 자세일 것이다.
주일예배에 나오는 옷차림도 바른 것이어야 한다. 외양을 중시여기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차림새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마음이 담긴 차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이나 주지사를 만나는 자리에도 청바지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에 청바지를 입고 나와도 좋으리라. 그러나, 대통령이나 주지사를 만나러 가는 자리에는 정장의 옷들 중에서도 제일 좋은 옷을 골라 입으면서, 아니 갖고 있는 옷들 가운데 마땅히 입을만한 옷이 없다고 고급의 옷을 구입하여 입으면서, 하나님을 만나러 나올 때는 아무렇게나 대충 입고 나온다면 이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세상의 주지사보다 못하시거나 아예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다.

성도에게 온전하고 구분된 주일예배 드림이 참으로 귀하고 중요한 것이 사실이나 더 귀하고 중요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그의 삶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권고하고 있다. 여기서 성도의 몸(σώμα)은 그의 전부--삶 그 자체를 의미한다. 주일날 거룩하고 온전한 예배는 드렸는데 그의 삶이 주일예배의 거룩함을 뒷받침 하여주지 못한다면 이는 “거룩한 산 제사”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의 삶--“영적 예배”의 삶이 아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거룩을 본받는 자의 삶이 되어야 하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이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


성경구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한 15:11);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요한복음 17:13)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내가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요한 15:1),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한 15:5)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과 예수님과 크리스천과의 관계를 설명하신다. 곧,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요, 예수님은 농부가 가꾸는 포도나무요, 크리스천들은 포도나무의 가지들이라는 것이다. 농부(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은 그가 가꾸는 나무가 많은 과실을 맺는 것인데,  이것이 또한 포도나무(예수님)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포도나무의 존재목적은 실한 포도를 풍성히 맺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줄기를 통하여 뿌리의 자양분을 잘 흡수할 때 그 가지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러나, 줄기에 붙어있는 것 같은 가지인데 속으로 벌레가 먹었다거나 또 다른 이유로 자양분을 흡수하는 구멍이 막혀 있다면 이 가지는 점점 말라져서 포도 열매는커녕 줄기에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가지를 “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않는 가지”(요한 15:4, 5)라고 하신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천이라고 하지만 주님 되신 그리스도 안에,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 거하지 않을 때 이 사람은 말라서 버리워지는 가지와 같은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한 15:6-7)고 말씀하신다.
이어서 예수님은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한 15:8)고 말씀하신다.
농부이시며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므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축복 가운데 거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 2:14)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거하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케 하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의 원하심도 하나님 아버지와 같다. 이는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가 되시기 때문이다.

아들로서 오신 예수님의 기쁨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다. 아버지의 계획이 아들의 순종함을 통하여 온전하여지는 것이다. 효자 아들은 아버지의 원하심을 위해서는 자기의 몸을 아끼지 않는다. 추운 겨울에 잉어를 들기를 원하시는 아버지를 위해서 얼음을 깨고 하루종일 쭈그리고 앉아서 잉어를 낚아서 아버지의 진지상에 올려드리는 것이 그의 기쁨이다. 아들로서 오신 예수님의 아버지의 사랑이 이와같으며 그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아버지의 뜻을 이룸이 그의 기쁨이다.
       
예수님의 기쁨은 아버지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라고 하신다. 뿐만 아니라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그의 제자들도 그와 같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을 볼 때 그의 기쁨이 배가된다.

10-11절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되 의무감으로가 아니라 마음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리할 때 이것을 보는 것이 그리스도의 기쁨이요, 이것을 행함이 성도의 기쁨이 됩니다. 이것이 “기쁨으로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이다.
예수님은 그의 큰 기쁨의 사랑을 나타내고자 친구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13-14절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신다.
죽음이 두렵고 고통스럽기는 육신의 옷을 입으신 예수님께도 마찬가지였지만 친구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친구의 구원과 영생을 위하여 기쁨으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다.

요한복음 17장 13절에서 예수님은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중에 일부이다.
예수님의 기쁨은 제자요 친구인 우리들을 사랑하심으로 그의 목숨을 버리심이다. 그리하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아 알아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거할 때, 그리스도의 기쁨이 이로서 충만하여지며 우리에게 전달되어질 수 있다.

잃은 자를 찾은 하나님의 기쁨

잃은 자를 찾은 하나님의 기쁨



성경구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누가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누가 15:10);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누가복음 15:32)


아리조나 주에서 생긴 일이다. 아버지와 함께 사냥하러 갔던 아이가 길을 잃어버려 캠프를 찾지 못하고 6일 밤낮을 헤매다가 마침내 캠프에서 32마일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돌아온 아이를 껴안고 흐느껴 울며 소리친다. “내 아들을 다시 찾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그러고는 너무 기쁜 나머지 기절하였다.
1천여 명을 동원하여 아들을 찾고 있던 아버지도 전화로 아들을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만다. 잃었던 아들을 찾은 그 부모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케 하는 장면이다.

밖에서 잘 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큰애와 둘째 애가 없어졌다. 이곳 저곳을 헤매며 한참을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러다가, 같이 놀만한 아이들의 집을 노크하며 우리 애들을 못 보았느냐고 물어본다. 몇 아이를 거쳐서 어떤 아이가 맞은 편 동의 누구네 집에 있을 것이라고 한다. ‘여기도 없으면 어떡하나’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그 집을 노크했을 때 ‘무슨 일이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빠꼼히 내다보는 아이들을 발견하였을 때는 순간 화가 치솟아 올랐다. 그러나, 이내 아이들을 찾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어떤 아들이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먼 곳으로 떠났다. 얼마간의 세월이 지나며 그는 타지의 삶에서 지치고 실망하여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부모님이 과연 자기를 받아줄지 몰라서 부모님께 편지를 띄웠다. 편지 내용 중에 “만일 저를 받아주실 뜻이 계시면 집 앞에 있는 오크나무(떡갈나무)에 노란 리본을 달아매 놓으시기 바랍니다”라고 썼다. 기차가 마을 가까이로 접근해 간다. ‘만일 부모님이 노란 리본을 나무에 매달지 않으셨으면 어떡하나?’ 기차가 마을에 거의 다 도달할 때 이 사람의 마음을 초조와 불안으로 어쩔 줄 모른다. 기차가 모퉁이를 돌아 이 사람의 집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집 앞의 오크나무도 눈에 들어온다. 그 나무를 바라보는 아들은 기쁨으로 넘친다. 나무 가지마다 온통 노란색의 리본으로 뒤덮여 있었다. 노란 리본을 하나나 둘만 매달아 놓으면 혹시 아들이 리본을 못 볼까봐 아버지는 나무에 온통 노란 리본을 매달아 놓았던 것이다.

세상에서 방황하는 자녀들을 생각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와 같다. 사람들이 아버지의 뜻을 모를까봐,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할까봐 하나님은 온통 당신의 뜻을 알게 하시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녀를 얼마나 기뻐하시는가 성경 곳곳에서 표현하신다.
하나님 밖에 있던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세 가지 비유를 들고 계시다.
                                                   
첫째는 일백 마리를 양을 갖고 있던 사람이 한 마리 양을 잃었을 때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말씀하신다. 아직 아흔 아홉 마리가 그 사람의 수중에 있지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귀하게 여기고 그 한 마리를 찾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고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또 찾은즉 찾은 기쁨을 벗들과 함께 누리기 위하여 잔치를 베푼다.

열 드라크마(=데나리온과 같은 가치의 헬라 화폐단위, 일꾼의 하루 품삯)를 갖고 있던 여인이 집안에서 한 드라크마를 잃었을 때 이 여인은 등불을 켜고 집안 구석구석을 쓸며 찾는다. 그리고 찾았을 때 벗과 이웃을 불러 그들과 함께 찾은 기쁨을 누린다.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타지에 나가 더 큰 세상을 배우겠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자기에게 유산으로 주기로 작정한 몫을 미리 달라고 떼를 쓴다. 아버지는 순순히 둘째 아들에게 그의 몫을 내어준다. 그러나, 세상 경험이 없고 물정이 어두운 둘째 아들은 곧 그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 남의 집에 돼지를 치는 머슴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집 주인이 야박하였던지 먹을 것도 배불리 먹지 못하여 돼지가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는 생활을 하게 된다.

주린 상태로 살아가던 둘째 아들은 생각다 못하여 그가 떠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한다. 그러나, 아들이라 일컬음 받기를 스스로 감당할 수 없어 아버지 집의 품꾼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아버지 집을 찾아가는 둘째 아들의 마음은 두근두근 하다. 객지에서의 생활이 자신 있다고 그렇게 큰소리 치고 나왔는데 이제 거지의 몰골로 품꾼의 하나로 써달라고 사정하려고 아버지를 찾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연로한 아버지는 멀리서 오는 초라한 몰골을 보자마자 둘째 아들인줄 알아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했다(눅 15:20). 그의 모든 잘못은 묻지도 않고 다만 잃어버렸다가 돌아온 아들을 찾은 기쁨으로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푼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회개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슙[שׁוב]은 ‘돌아오다’라는 의미임)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뜻이다. 누가복음 15장 32절에서 아버지는 불평하는 큰아들에게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스스로 정한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을 향하여서도 오래참음으로 기다리신다. 그들이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기쁨으로 껴안으실 것이다. 로마서 10장 21절에서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표현할 때,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한다.

아직 하나님 밖에 있는가? 하나님 안으로 들어와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아직 당신의 마음 밖에 계신가?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주님을 마음 중심으로 영접할 것이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회개함과 주님을 영접함으로 인하여 기뻐하실 것이며, 당신은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즐거워할 것이다.

성도의 진실한 삶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성도의 진실한 삶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성경구절: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언 12:22).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언 15:8)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언 21:3)


사람들은 때로 아부의 말을 듣고 기뻐한다. 그 사람의 의도가 의심스럽다고 여겨지더라도 밝혀지기 전까지는 그의 입에 발린 말에 솔깃해한다. 그러나, 그것이 입에 발린 말이요 거짓임이 밝혀질 때에는 실망이 크다. 이 세상에서 잘 살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아부도 할 줄 알고 적당히 거짓말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고지식한 사람이요 융통성이 없는 사람으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다.
그러나 진실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아진 그의 자녀들도 진실하고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외형으로만 하나님께 경배하고 제사 드리는 것은 원치 아니하신다. 그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며, 진실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신다. 세상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아도, 세상사람들한테는 멸시를 당하여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을 기뻐하신다고 했다.

왜 그런가?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양이기 때문에 그렇다. 부모가 자기를 닮은 자식이 더 사랑스럽고 더 정이 많이 가듯이, 우리의 영적 부모이신 하나님께서도 진실되고 정직한 자, 곧 당신을 닮은 자녀가 사랑스러우시고 기쁨의 대상이 된다.
“악인의 제사는 미워하신다”고 했다. 아무리 좋은 것으로 제사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고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동떨어진 자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물리치신다. 그러나, 제물을 구할 형편이 못 되어 제사는 드리지 못하고 기도만 드린다고 하더라도 심중이 주님께로 향하여 있고 정직한 삶을 사는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다.

하나님 앞에 제사--예배를 드리는 의미가 무엇인가?
자기의 행한 것--죄와 허물을 돌아보고 더욱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복된 삶을 살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 제사행위가 바르지 못하고 형식으로만 드려지는 것이라면, 이는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이를 물리치신다.
하나님 앞에 진실되고 의로운 제사--예배를 드린 사람이 의와 공평을 행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이 사람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이 사람에게 하나님은 구원과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 되시기에 그의 정직하고 진실한 삶으로 그의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다.

자녀로 인한 하나님의 기쁨

자녀로 인한 하나님의 기쁨


성경구절: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편 149:4)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를 기뻐하신다(시편 35:27, 149:4).
그의 백성을 기뻐하시되 그가 외적 조건(재물, 학벌, 지위)이 좋아서 기뻐하시는 것이 그의 자녀이기 때문에 기뻐하신다. 결혼을 하여 첫 아기를 얻은 기쁨을 기억한다. 그 아이의 얼굴이 하얗고 피부가 매끄럽지 아니하여도 나의 아이 되기 때문에 기쁜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로 말미암아 기뻐하신다. 시편 16편 3절에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라고 말씀하신다.
나의 모습이 내 눈에 초라하고 형편없이 보일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존귀하게 여기시며 나의 작은 마음이 드리는 감사와 찬송을 기뻐받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출중한 외적 조건을 갖고 있어서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주요 아버지’라 고백하기에 기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영원한 생명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시편 18편 19절에서 시편기자는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잘 되는 것(번성, prosperity)을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을 닮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주신 축복이 무엇인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결혼을 하여 자녀를 많이 낳고 이곳 저곳 흩어져서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세상에 흩어져서 살되 그저 무의미하고 별 볼 일 없이 살 것이 아니라 의미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셨다.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며, 어둠을 밝혀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는 역할을 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에서 살아가되 세상을 향하여 큰 소리 치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신명기 28장 63절에 보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볼 때, “여호와께서 너희로 번성케 하기를 기뻐하셨다”고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으면--즉, 그의 백성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따를 때, 그들로 번성하는 삶 살기를 원하신다.

하늘나라에서는 물론이고,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번성하며 축복 받는 삶을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과 계획에 따라서 이러한 외적 번성함이 없는 (그러나 내적 번성함은 여전히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축복하신 그 축복--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을 우리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에게 여전히 주시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와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기만 한다면 말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의 (마음의) 형통함을 기뻐하신다.
시편 35편 27절에 “나의 의를 즐겁게 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라고 했다.
여기서 형통(亨通, prosperity[KJV], welfare[RSV])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샬롬(
שָׁלוֹם)인데 이는 평안, 화평 또는 평안함으로 얻는 기쁨, 행복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가 쪼들리고 실망하고 슬퍼하며 고통당하는 삶을 살기를 원치 아니하시며 마음에 평안과 행복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신다.
형통--마음의 평안과 행복은 꼭 외적인 번성함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계심이 믿어지고 하나님께서 복주시는 분이심을 인정할 때 얻어진다.

하나님은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 하나님의 영--성령을 부어주신다.
이사야 42장 1절에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흙으로 빚으시고, 하나님의 생기(네샤마: נשׁמה--바람, 호흡, 삶의 기운)를 불어넣어 주심으로 그로 생령(生靈)이 되게 하셨다고 했다(창 2:7).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함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삶의 기운을 상실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의 생기--생명의 기운을 상실하고 이 세상에서 고통당하며 낙담하며 죽어가는 인간을 여전히 사랑하시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으며 그를 통하여 듣게 하시고, 첫 번째 생기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영(성령=루아흐: רוח=호흡, 생기, 바람)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원하신다. 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을 (진정한) 자녀로 여기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진정한 자녀가 되기 위해서 성령의 역사하심이 우리 가운데 느껴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즐거움 가운데 참여시키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의 달란트의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를 잘 경영하여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과 두 달란트를 잘 경영하여 두 달란트를 남긴 종에게 주인은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태 25:21, 23)고 말씀한 것같이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로 영원하신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기를 기쁨으로 기대하신다.
                           
                       

성도의 찬송과 감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성도의 찬송과 감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성경구절: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편 69:30-31)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첫 번째 목적은 그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중심이 담겨있는 찬송과 감사를 통하여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셨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생육, 번성, 충만, 정복, 다스림”의 축복을 주셨는데,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지혜에까지 높아지기를 원하였던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범죄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신 축복을 상실하고, 찬송과 감사 대신에 원망과 불평을 발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 선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중심이 담겨 있지 않은 황소의 제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찬송함과 감사함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짐승의 번제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여서 하나님께서 이를 잡수시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번제--예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드렸는가를 보시고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드린 사람과 그 예물은 기뻐 받으시고, 그렇지 못한 마음으로 드린 사람과 그 예물을 기뻐 받지 아니하신다(창 4:4-5).
바울이 에베소서 1장 3-14절에서 반복적으로 말씀하는바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멀리 떠난 인간들에게 예정의 때가 이르매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회복하여 주시고자 하는 축복은 그들이 잃었던 영원한 생명을 주심이다. 사람들의 모든 죄와 허물을 사하여주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왜 이렇게 하시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것을 사람들을 통하여 듣고 보기를 원하시는 까닭이다. 에베소서 1장 3절에 “찬송하리로다”; 6절에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12절에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4절에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그의 지으신 사람이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그의 구원을 찬송하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그 일을 기뻐하신다.
스바냐 3장 17절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고 말씀한다. 선지자 스바냐의 신앙고백이다. 1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 중에 계신다고 약속하셨다. 스바냐는 그의 자녀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과 순종의 자녀들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는 모든 일을 이루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에게 구원의 기쁨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로 말미암아 기뻐하신다고 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어주신 자들이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는데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실 정도로 기뻐하신다고 했다. 죄와 허물의 짐을 벗어버리고 찬송과 감사와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참으로 대견하고 자랑스러우심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기쁨이다.

하나님께서 욥을 기뻐하시며 대견해하심이 이러하셨다. 욥기 1장 8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욥을 자랑하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영적 부모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조그마한 하나님에 대한 찬송과 사랑에도 감격해하시며 기쁨을 이기지 못해하신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의 주체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전능자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운 찬송을 부르듯이 우리의 영적 부모이신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주님을 찬송하는 우리로 말미암아 기쁨의 찬송을 부르신다.
우리는 우리의 입술로, 마음으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되, 기쁨으로 찬송해야 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사하셨으며, 우리를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으로부터 건지셨으며, 우리 중에 거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한없는 평안과 긍휼을 주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찬송하고 기뻐하는 삶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즐거운 노래를 부르실 것이다.

교회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의 입술에 기쁨의 찬송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권면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기쁨으로 찬송할 것이다. 우리의 입술과 마음과 우리의 삶 전체로 하나님을 찬송할 때, 이를 보시는 하나님의 기쁨 또한 넘치실 것이며 하나님 역시 즐거운 찬송을 부르실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조화하며 화답하며 기뻐하는 찬송의 삶이 우리 각 사람에게 나타나기를 바래본다.

순종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순종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성경구절: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를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자녀를 키우다 보면,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아이도 있다. 순종하는 아이가 단지 아버지가 무서워서 순종하는 것이라면 이는 그리 기쁜 일이 아닐 것이지만, 부모를 존경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이라고 한다면 이는 참으로 대견하고 기쁜 일이l다. 순종하는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고 마음 속으로부터 사랑함에서 나온 순종이라면 하나님은 이를 말할 수 없이 기뻐하실 것이다.

인류역사의 비극은 불순종에서 비롯되었다.
창세기 2장 16-17절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에 대해서 엄격하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순종하기만 하였다면, 낙원에서 쫓겨나는 안타까움과 따라서 영원한 삶을 상실하는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심이 어떤 연유였을까?
이 사울이 누구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께 왕을 달라고 하였을 때(삼상 8:4-7)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백성의 요청을 들어주라고 하셨다. 물론, 그 마음에는 신정정치 대신에 왕정정치를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섭섭함을 갖고 계셨지만.... 어떠한 연유에서건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붓게 하시고 그를 왕으로 삼으신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셨다(삼상 10:1). 그러나, 그가 기름 부으시고 왕으로 삼으신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으로 그를 대신하게 하심은 무슨 까닭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까닭이다.
사무엘상 15장 11-12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고 하신다.
다윗을 세우시고 그를 기뻐하시고 축복하심은 다윗이 사울보다 더 윤리적이고 외적 조건이 뛰어난 까닭이 아니다. 다윗의 심중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를 기뻐하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의 믿음”이다. 순종은 ‘믿음 이전의 믿음’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8절에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그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지가 오래되었고 하란을 출발한 지도 십년이 더 지났는데 아직도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지 않음에 그의 마음에 원망이 생겼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밤하늘의 뭇 별들을 가리키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라고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은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다고 했다. 창세기 15장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순종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여기셨다.

아브라함의 나이 구십 구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실 때, 이 말씀이 믿어지지 않은 것이 사라 뿐이었겠나?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생각만으로 본다면 이 말씀이 도무지 믿기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위대함은 ‘믿음이전의 믿음’--순종함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내 아내 사라의 경수가 끊어졌는데요.’ ‘우리 주위에 저처럼 나이 들어서 아이를 가진 사람이 없는데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매 순종함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였다. 바울은 로마서 4장 18절에서 “아브라함이 (후손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순종함으로) 믿었으니”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할 때 마침내 그의 나이 백 세 때에 약속의 자녀 이삭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약속의 자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주저함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사라에게 이 일을 의논하지 않았다. 그러했다면, 사라의 성격상 그대로 있지 않았을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고뇌와 고통이 없었겠나? 아브라함이 이것이 하나님의 시험인 줄 알았겠나? ‘나의 믿음이 어떤지 시험하시는 것일 뿐이야.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흉내만 내면 되는거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인가 중지시키실꺼야.’ 이런 계획된 짜임 속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겠나? 아브라함은 다만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으로 사흘길을 행하여 모리아산에 이르고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기 위하여 그를 데리고 산을 오르고 있었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다른 것은 다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할 때 이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에서 우리는 순종하는 믿음의 결정체를 볼 수 있다. 창세기 22장 8절에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미리 가르쳐주신 대답도 아닌데 그의 순종이 그로하여금 극한 감동을 주는 믿음의 대답을 하게 만들었다. 이는 또한 부활의 하나님을 증거하는 고백이기도 하다. 약속의 아들 이삭을 통하여 그의 후손이 하늘의 뭇별과도 같이, 바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의 자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명백한 상충(conflict)인데 아브라함은 이를 가지고 하나님께 따지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바보라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과 명령의 모순을 몰랐겠나?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17-19절에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증언한다.
경수가 끊긴 그의 아내 사라의 나이 구십세와 그의 나이 백세에 약속의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지금 이 아들을 번제물로 취하신다고 하더라도 그의 언약을 이루실 분이심을 순종의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바람의 고백은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이다. 이 믿음의 고백이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시게 했겠을까? 얼마나 하나님을 감동시키셨겠나? 요즈음도 이러한 고백을 우리가 할 수 있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로 얼마나 기뻐하실까?
창세기 22장 12절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극박한 목소리로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기쁘심과 만족하심이 이 말씀 가운데 가득히 담겨져 있다.

하나님은 순종의 믿음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이 순종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아브라함을 축복하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이셨다. 그뿐 아니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또 영화롭게 하시는 순종이 어떠한 것인지 우리로 알게 하셨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8-1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이름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증거한다.
또, 바울은 로마서 6장 16절에서 “(하나님의)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른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마음 중심에서 주님을 사랑하기에 그에게 순종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복 주시기를 원하시며, 구원하시고, 그의 이름을 높이실 것이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나는 이적을 행하기보다는 순종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우리에게 제사보다 나은 순종이 있어야 할 것이며 수양의 기름보다 더 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청종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찾는 자의 기쁨

하나님을 찾는 자의 기쁨


성경구절: “무릇 주를 찾는 자는 다 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편 40:16)
“주를 찾는 모든 자로 주를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로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편 70:4);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시편 105:3)

하나님은 ‘기쁨의 근원’되신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6일에 걸쳐서 창조하실 때 자신의 창조하신 것에 대하여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을 일곱 번 반복하신다(1:4, 10, 12, 18, 21, 25, 31). 그런데 특기할 만한 것은 궁창(=하늘, 공중)을 지으신(“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시기 위하여”: 7절) 두 번째 날에 대해서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표현이 없다. 이에 대해 탈무드는 아마도 공중의 권세를 사탄에게 주실 것이기에(엡 2:2 “공중 권세 잡은 자”) 그 표현이 빠지지 않았나 추정한다.
그러나, 지구의 형성--땅과 바다--과 땅 위에 풀과 채소와 나무를 창조하신 셋째 날과 땅 위에 생물과 사람을 창조하신 여섯 째 날에 대해서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표현이 각각 두 번씩(1:10, 12; 1:25, 31) 기록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살게 하실 땅과 땅 위에 피조물을 창조하심을 기뻐하셨다는 증거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심에는 그 기쁨이 특별하시기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31절)

둘째 날을 제외한 각 날의 창조에 대하여 “보시기에 좋았더라” 란 표현이 일곱 번이나 반복하여 사용된 것은 하나님께서 본래 만드신 세상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자유롭고, 죄와 허물의 문제가 없고, 오직 즐거움과 기쁨만이 넘쳐나는 장소로 계획되어졌음을 감지할 수 있다.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꼐서 그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첫 번째 사람--아담과 하와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동산, 낙원(파라다이스: παράδεισος)은 축복과 기쁨의 장소였다. 낙원은 blissful, 즉 더없이 행복한 또는 기쁨이 가득 찬 장소란 뜻이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에게 허락하신 낙원은 늙음이나 아픔이나 슬픔이나 병듦이 없는 장소였다. 그러나, 뱀이 그들을 미혹할 때 아담과 하와는 거기에 넘어가고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지고의 기쁨과 즐거움의 장소를 상실하게 되었다. 대신에, 그들에게 생노병사의 고통과 슬픔이 찾아들었다. 썩지 않을 것으로 창조되었던 것이 썩어짐에 종노릇하게 되었다(롬 8:21).
그러나,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꼐서는 그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본래 허락하셨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셨다. 따라서, 경륜(=오이코노미아, 인간구원, 엡 1:9)의 때가 이르매 사람들을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요한 1:14). 이 사건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9-10절에서,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인간구원)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은 우리들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기쁨을, 하나님 안에 있는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는 것이다. 전에 아담과 하와의 타락함으로 잃어버렸던 낙원(=Lost Paradise)을 다시 되찾아 주시기를 원하신다. 곧,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The New Heaven and the New Earth)'이 그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서 그곳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하심으로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도래될 기쁨의 장소를 소망 중에 기다리되 우리는 현재 이 세상에서도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생활할 수 있다. 이는 현재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며,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은 기쁨의 근원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쁨의 신앙의 삶을 살아가면서 기쁨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기쁨을 함께 기뻐하시며,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기쁨의 찬송과 감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는” 하나님이시다(습 3:17).

교회는 주님의 기쁨과 즐거움을 소개하며 제공할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기쁨의 근원이신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며 주인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상실한 기쁨의 원인과 기쁨의 장소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며, 우리의 기쁨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셨는데, 우리에게 기쁨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기쁨이 있고,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하며 찬송하는 기쁨이 있는 교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 위에, 기쁨을 상실하고 여전히 암울한 가운데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제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축복(blessings) 받기를 좋아한다. 찬송가 가사에도 있듯이(1장, 28장)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다.
우리가 말하는 축복은 기쁨을 동반한다. 기쁨(bliss)이 없는 복(blessing)은 참된 축복이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사업이 번창하여 백만장자가 되었는데 어떤 연유(상실, 고통)로 인하여서 그 사람에게 기쁨이 없다면 이는 진정한 축복은 아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복은 기쁨이 따른다. 시편 1편 1절에 나오는 복(“복 있는 사람은”)--아슈레이(blessed, happy)--은 "그 마음에 평안(행복, 기쁨)이 계속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기쁨과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매 우리에게는 기쁨과 복이 넘쳐난다.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


성경구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세기 1:28, 31)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6일에 걸쳐서 창조하실 때 자신의 창조하신 것에 대하여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을 일곱 번 반복하셨다(1:4, 10, 12, 18, 21, 25, 31).
그런데 특기할 만한 것은 궁창(=하늘, 공중)을 지으신(“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시기 위하여”: 7절) 두 번째 날에 대해서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표현이 없다. 이에 대해 탈무드는 아마도 공중의 권세를 사탄에게 주실 것이기에(엡 2:2 “공중 권세 잡은 자”) 그 표현이 빠지지 않았나 추정하고있다.
그러나, 지구의 형성--땅과 바다--과 땅 위에 풀과 채소와 나무를 창조하신 셋째 날과 땅 위에 생물과 사람을 창조하신 여섯 째 날에 대해서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표현이 각각 두 번씩(1:10, 12; 1:25, 31) 기록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살게 하실 땅과 땅 위에 피조물을 창조하심을 기뻐하셨다는 증거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심에는 그 기쁨이 특별하시기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31절)

둘째 날을 제외한 각 날의 창조에 대하여 “보시기에 좋았더라” 란 표현이 일곱 번이나 반복하여 사용된 것은 하나님께서 본래 만드신 세상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자유롭고, 죄와 허물의 문제가 없고, 오직 즐거움과 기쁨만이 넘쳐나는 장소로 계획되어졌음을 감지할 수 있다.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첫 번째 사람--아담과 하와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동산, 낙원(파라다이스: παράδεισος)은 축복과 기쁨의 장소였다. 낙원은 blissful, 즉 더없이 행복한 또는 기쁨이 가득 찬 장소란 뜻이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에게 허락하신 낙원은 늙음이나 아픔이나 슬픔이나 병듦이 없는 장소였다. 그러나, 뱀이 그들을 미혹할 때 아담과 하와는 거기에 넘어가고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지고의 기쁨과 즐거움의 장소를 상실하게 되었다. 대신에, 그들에게 생노병사의 고통과 슬픔이 찾아들었다. 썩지 않을 것으로 창조되었던 것이 썩어짐에 종노릇하게 되었다(롬 8:21).
그러나,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본래 허락하셨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셨다. 따라서, 경륜(=오이코노미아, 인간구원, 엡 1:9)의 때가 이르매 사람들을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요한 1:14).
이 사건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9-10절에서,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인간구원)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은 우리들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기쁨을, 하나님 안에 있는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는 것이다. 전에 아담과 하와의 타락함으로 잃어버렸던 낙원(=Lost Paradise)을 다시 되찾아 주시기를 원하신다. 곧,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The New Heaven and the New Earth)'이 그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서 그곳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하심으로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도래될 기쁨의 장소를 소망 중에 기다리되 우리는 현재 이 세상에서도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생활할 수 있다. 이는 현재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며,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은 기쁨의 근원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쁨의 신앙의 삶을 살아가면서 기쁨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기쁨을 함께 기뻐하시며,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기쁨의 찬송과 감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는” 하나님이시다(습 3:17).

교회는 주님의 기쁨과 즐거움을 소개하며 제공할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기쁨의 근원이신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며 주인 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상실한 기쁨의 원인과 기쁨의 장소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며, 우리의 기쁨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셨는데, 우리에게 기쁨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기쁨이 있고,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하며 찬송하는 기쁨이 있는 교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 위에, 기쁨을 상실하고 여전히 암울한 가운데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제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축복(blessings) 받기를 좋아합니다. 찬송가 가사에도 있듯이(1장, 28장)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다.
우리가 말하는 축복은 기쁨을 동반한다. 기쁨(bliss)이 없는 복(blessing)은 참된 축복이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업이 번창하여 백만장자가 되었는데 어떤 연유(상실, 고통)로 인하여서 그 사람에게 기쁨이 없다면 이는 진정한 축복은 아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복은 기쁨이 따른다. 시편 1편 1절에 나오는 복(“복 있는 사람은”)--아슈레이(blessed, happy)--은 "그 마음에 평안(행복, 기쁨)이 계속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기쁨과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매 우리에게는 기쁨과 복이 넘쳐난다.

화평케 하는 자의 복

화평케 하는 자의 복


성경구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마태 5:9).


산상수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의 받을 복”에 대해서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먼저 “화평케 하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에베소서 2장 14-18절에서 바울은 “그(=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화평케 하는 일’을 감당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낮아지신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또한 십자가를 지셨다. 화평케 하는 일을 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낮아짐이 필요하다. 자신을 돌아봄에는 인색하고 다른 사람을 평가함에는 관대함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에게는 비판적이고 다른 사람을 대함에는 긍휼함이 필요하다. 화평케 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할만한 조건들을 발견하여야 한다. 해서, 그들이 미운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픈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와 나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그로 더불어 화목할 수 있어야 한다.

한 강도가 어느 집에 들어갔다. 강도가 집주인에게 권총을 겨누며 ‘손을 들라’고 말한다. 강도의 말에 주인은 한쪽 손만을 든다. 강도는 ‘다른 쪽 손도 들라’고 강압적으로 말한다. 주인은 얼굴을 찡그리며 ‘오른 손에 신경통이 있어서 들 수 없는데요’라고 대답한다. 강도는 주인에게 “신경통이 있어요? 사실은 나도 신경통이 있는데...” 하고 그들은 밤을 새워서 그 신경통에 대하여 고통스러움과 치료방법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다. 한 사람은 죽일 수 있는 입장이고 다른 사람은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입장이었지만, 신경통이라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이 그들을 가깝게 묶은 것이다.

우리 교우들은 서로에게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많은 공통점이 있다. 우리 모두 예외 없이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의 짐으로 인하여 항상 마음이 무거웠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의 구속자가 되어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우리 인생항로에 선장이 되신다. 우리의 장차 가는 곳이 또한 한 방향--하나님나라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화평을 나누어주는 사람들이어야 할 것이다. 옆 사람이 지쳐있을 때, 신앙이 뭐 저 모양이냐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에게 팔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워줘야 할 것이다. 때로는 그를 부축하고 함께 길을 가줘야 할 것이다. 우리 교회에 이런 모습들이 있기를 바래본다.

약속의 자녀 이삭

약속의 자녀 이삭


성경구절: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2-23)


사람들은 한 번 약속한 것을 어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몇 번씩이나 다짐하였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정이 생기면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번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행하시는 분이시다. 약속을 언제 이행하실지 시기에 관하여 정한 바가 없기 때문에 참을성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 임의로 약속의 이행 때를 짐작해보다가 그때에 하나님의 약속이행이 없으면 실망하거나 포기하고 돌아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를 떠날 때, 또한 후에 하란에 머무르다가 그곳을 떠날 때, 세 가지로 그에게 약속을 주셨다. 땅의 약속, 민족의 약속, 복의 약속이 그것이다. 하란을 떠난 지 십 년쯤 되었어도 그에게 후사가 없어 아브라함은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확인시켜 주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지만 아브라함은 그의 정한 때에 후사가 없었기에 불만의 마음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아브라함은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하나님께서 밤하늘의 뭇 별들을 보여주시며 민족의 약속을 이행하실 것을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은 이를 믿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게 되었다(창 15:6).
그런 후 1-2년이 지나도 자녀가 생기지 않자 아브라함은 사라의 권유대로 하갈과 동침하고 그와의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얻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 육체를 따라 난 자녀이지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나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고 ‘사라의 몸에서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에게도 이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엎드리어 웃었다. 그리고 대답한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 17:18).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지만 20여 년이나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하매 약속 그 자체가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다. 약속을 주시되 8,000가지 이상의 많은 약속을 주십니다. 선거 때마다 정치인이 하는 많은 약속들은 거의 공약(空約)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많을지라도 반드시 이행되어지는 약속들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食言)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19)고 했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바라보고 얻기를 소망하되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약속들을 얻어야 할 것이다.

알지 못함을 아는 지혜

알지 못함을 아는 지혜


성경구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한 9:41)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Know thyself)”고 말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알지 못함을 모르고 행동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해서, 모르는 것을 더욱 열심히 배워 알고자 한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71장에,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은 뛰어난 것이다(知不知上).
     모르면서도 안다고 하는 것은 병이다(不知知病).
     병을 병으로 알 때만 병이 되지 않는다(夫唯病病, 是以不病).
     위대한 사람(聖人)은 병이 없다(聖人不病).
     병을 병으로 알기 때문에 병이 없다(以其病病, 是以不病)”라고 했다.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척하는 병”이 있다. 목사의 자질이 없으면서도 목사의 자질이 ‘있는 척’ 하고, 장로의 믿음이 없으면서도 믿음이 ‘있는 척’ 하고, 권사나 집사의 믿음의 교양이 없으면서도 ‘있는 척’ 하고 있다. “척하는 병”보다 더욱 큰 문제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목사와 장로를 포함하여) 믿음과 자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줄로 여기는 착각”이란 병이다.

목사가 된 사람은 자기에게 목사의 권위와 자질이 있는 줄로 알고 있고, 장로가 된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장로가 되었는지 돌아보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장로가 될만한 믿음과 자격이 충분히 있는 줄로 알고 있고, 집사가 된 사람은 사실은 될 사람이 없어서 어쩌다 자기 같은 사람도 된 줄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자기가 집사의 자격요건이 충분해서 된 줄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척하는 병”에 걸리지 않고 “착각의 병”에도 걸리지 않은 사람이라면, 직분에 상관없이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 잘 깨달아 알 것이고, 해서 쓸 데 없는 믿음의 자랑도 하지 않고 자신을 내세우는 일은 더 더욱이 하지 않을 터인데, 그 고질적인 “척하는 병”과 “착각의 병”을 갖고 있는 탓에 “나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목에 너무 힘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께서 가장 의로운 삶을 살고 있고 모세의 율법을 아는 지식과 행함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그들의 영적인 무지를 인정하면 차라리 그들의 허물과 무지가 사함 받을 수 있었을 터인데, 그들이 (영적으로) 보지 못하면서 본다고 하니 그들의 죄와 허물이 사함 받지 못한 채 여전히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의 신앙의 삶으로부터 “체하는 교만”과 “영적 무지의 결과인, 아는 줄로 여기는 착각”을 몰아내어야 할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온전하신 은혜와 축복이 우리 가운데 풍성하게 머물기를 바래본다.


코람데오(Coram Deo)

코람데오(Coram Deo)


성경구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갈 1:20)


바울은 그의 증거가 참됨을 말할 때 '하나님 앞에서'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라틴어로는 코람데오(Coram Deo)라고 하는데, 인터넷 서점의 이름으로, 어떤 교회에서는 청년회지의 이름으로 사용될 정도로 일반화되고 널리 통용되는 용어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진실되고 바른 삶을 살아야 할 것은 우리는 마음과 말과 행동과 삶으로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언정 무소부재하셔서 모든 세상과 우리의 마음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에 손을 얹고 서약을 하고도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세상이지만, 믿는 사람들은 늘 '하나님 앞에 선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셔서, 내가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는 등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 “이 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너희에게 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고 했고, 에베소서 3장 14-15절에서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했다. 또한 로마서 9장 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11장 31절에서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고 했고, 디모데전서 2장 7절에서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우심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고 말씀한다. 바울이 이렇게 여러 곳에서 참말을 말한다고 강조함은 그만큼 그의 세대가 거짓과 진리가 구별되지 않던 시대임을 웅변적으로 대변해 주는 것이다.

어떤 무명의 크리스천 시인은 진실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성도들에게 권면한다:
    “당신이 생각할 때나, 당신이 말할 때나, 당신이 읽을 때나, 당신이 쓸 때나,
   당신이 노래할 때나, 당신이 걸을 때나, 당신이 기쁨을 구할 때나,
   집 안에서와 밖에서 모든 잘못된 것들을 피하기 위하여
     항상 하나님의 눈동자 아래에 있는 듯이 그렇게 생활하십시오.”

우리가 현재 사는 이 세상은 거짓이 만연되어 있는 곳이다. 정직한 사람이 때로는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장소이다. 참말을 말하여도 참말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여느 사람들의 거짓말과 구별되지 않고 참말이 거짓말처럼 그렇게 가볍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이다.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까?
세상사람들이 나의 말의 진정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진실을 말함으로 인하여 나에게 불이익이 돌아오고 내가 비방거리가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의 모습으로 참말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항상 코람데오(Coram Deo)--'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서있는 자의 진실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스스로 귀한 것으로 여기는 자가 되며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의 진리가 더욱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진실 되게 전파되어질 것이다.


가르치는 즐거움

가르치는 즐거움


성경구절: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갈라디아서 6:6)

어느 날 석가모니가 영산(靈山)에서 중생(衆生)들에게 불교의 진리를 설파한다. 석가모니는 연꽃 한 송이를 들어 중생에게 보인다. 아무도 그 뜻을 몰라 잠자코 있는데, 오직 가섭 존자만이 그 뜻을 깨닫고 빙그레 미소짓는다. 석가모니는 가섭이 그 뜻을 참으로 깨달았는지 물을 필요가 없다. 깨달음은 설명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설명하고자 하면 오히려 그 진리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석가모니가 가섭 존자에게 말한다. “내게는 정법안장(政法眼藏: 올바른 진리를 갖추고 있음)과 열반묘심(涅槃妙心: 열반상태의 미묘한 마음)과 실상무상(實相無相: 변화하는 생멸의 세계를 떠난 진리)과 미묘법문(微妙法門: 진리로 가는 미묘한 길)이 있는데, 문자를 통해 표현치 않고 교리 밖에 별도로 전하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마하 가섭에게 부촉하노라.”
  가섭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뜻을 마음으로 이해한 것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이 유래되었고 또한 이 사건에서 ‘염화시중의 미소’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가섭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깨달은 것은 그의 천재성에서 기인한 까닭도 있었겠지만,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는 그의 마음의 원함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공자의 제자 중에서 뛰어난 제자의 수가 70명 정도 되었다고 한다. 그 중에 자공(子貢)은 재능(才能)이 뛰어났고, 안회(顔回)는 덕(德)과 학문(學問)이 뛰어났다.
논어 공야장(公冶長) 편에 보면 어느 날 공자가 자공에게 묻는다. “자네와 안회 중에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가?”
자공이 대답한다. “제가 어찌 안회와 비교될 수 있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지만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아는 데 불과합니다.”
공자가 말한다. “그렇다. 자네는 안회만 못하지. 나와 자네 모두 안회만 못하다네.”
공자가 그렇게 끔찍이 사랑한 안회는 그러나 애석하게도 41세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공자는 옹야(雍也) 편에서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그를 회상한다. “안회는 학문을 좋아했고, 화가 나도 다른 사람에게 감정을 옮기지 않았고, 잘못을 다시 반복하는 일이 없었건만 불행히도 명이 짧아 일찍 죽어 지금은 없으니, 그 외에는 학문을 좋아한다는 제자를 아직 듣지 못하노라.”

공자가 선생으로서 사랑하는 제자 안회를 잃었을 때의 슬픔이 컸던 것은 그만큼 안회가 공자의 학문을 배우기를 힘쓰며 선생인 공자를 따랐기 때문이다. 안회가 공자의 모든 제자 중에서 학문이 뛰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달리 학문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스승이었지만 스승보다 뛰어난 제자에 대해서 시샘하기보다는 그의 학문 사랑하는 모습을 보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다. 맹자(孟子)가 말하는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가운데도 ‘천하의 영재(英材)를 얻어 그를 훌륭한 인재로 만들어 내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제자로서 우리가 연구하는 학문은 바로 주님이다. 가섭이 불교의 깨달음에 우월하고, 안회가 유교의 학문에서 뛰어났던 것같이 우리도 그리스도교의 학문에서 뛰어날 수 있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 학문의 대상인 주님을 사랑으로 대할 때 가능하다. 세상의 학문은 머리로 깨달아 진보가 있지만, 주님을 아는 학문은 가슴으로 깨달아 진보에 이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목회자에게도 귀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지는 교인들이 있는데, 목회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자 힘쓰며 그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성도들이다. 선생으로서 목회자의 역할은 다른 학문이나 예·체능계의 선생들과 다르다. 다른 분야의 경우에 선생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 주장이나 학설 혹은 기풍을 승계하여 발전시키는 일이지만, 목회자가 바라는 것은 교인들이 자기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전해지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목회자로서 나는 나의 설교를 듣고 나와 함께 성경공부를 하는 교인들이 나보다 더 그리스도를 많이 사랑하고, 더 그리스도를 아는 데(경험하는 데) 뛰어나기를 소망한다. 그리할 때, 나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즐거움이 더하리라.

인생의 사계(四季)

 인생의 사계(四季)


성경구절: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塑性)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시록 22:1-2)


일년에 사계(四季)가 있듯이 우리 인생에도 계절이 있다. 봄이 있는가 하면 여름이 있고, 여름이 있는가 하면 가을이 있고, 가을이 있는가 하면 겨울이 온다. 어떤 분과 대화하는 가운데 인생의 계절(季節)을 생각게 하는 일이 있었다. 양로원(養老院)에서 노인들을 돌봐주는 일을 하고 계신 분이 “노인이 되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시는 분을 보면 저까지 낙담이 돼요. 저는 제 몸을 잘 추수릴 수 있을 때까지만 살고 싶어요” 하신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오직 하나님께 달린 것을... 더욱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삶의 계절을 주셨을진데, 우리의 처한 계절에 충실하고 그 계절의 의미를 생각하는 우리이어야 하리라.

일년의 사계(四季)와 같이 우리들은 인생(人生)에 유·소년기(幼·少年期), 청년기(靑年期), 장년기(壯年期)와 노년기(老年期)를 보낸다. 유·소년기(幼·少年期)에는 누구나 그 자신은 남들과 같은 경로를 밟아 결국은 죽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자신은 언제까지나 늙지않고 죽지않을 것처럼 생각한다. 자라기는 하되, 죽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공평(公平)의 하나님이시다. 나만이 인생의 사계(四季)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 여정(旅程)을 따라서 살게 하신다. 청년기(靑年期)에 있는 사람이 노년기(老年期)에 있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은 그도 얼마 후에는 그 길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봄, 여름, 가을과 겨울이 각각 그 나름대로 독특한 멋이 있어 지낼만하듯이 인생의 사계도 그 나름대로 독특한 멋이 있다. 다만, 일년의 겨울 다음에 봄이 오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확실(確實)한 것과는 달리, 인생의 겨울 다음에 만물이 생동(生動)하는 봄이 옴은 모든 사람에게 그리 확신 있게 보이지는 않고 소망 중에 기다려지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그러한들 우리 인생이 어찌하랴? 그것이 우리 육신의 죄(罪)로 인해 겪어야 할 과정(過程)인 것을.

육신은 비록 죄의 법으로 인해 늙고, 병들고, 죽으나, 우리의 영혼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주님의 낙원(樂園)에 들어갈 수 있음을 감사한다. 다른 사람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나로 인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겪게 하심을 감사할 수 있으면 좋으리라.

여름을 보내고 있는 청년으로서는 풍성하고 좋은 열매를 맺을 가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겨울을 보내는 분들은 인생의 겨울이 지나더라도 영원한 계절(季節)이 올 것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