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pril 11, 2012

화평케 하는 자의 복

화평케 하는 자의 복


성경구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마태 5:9).


산상수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의 받을 복”에 대해서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먼저 “화평케 하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에베소서 2장 14-18절에서 바울은 “그(=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화평케 하는 일’을 감당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낮아지신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또한 십자가를 지셨다. 화평케 하는 일을 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낮아짐이 필요하다. 자신을 돌아봄에는 인색하고 다른 사람을 평가함에는 관대함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에게는 비판적이고 다른 사람을 대함에는 긍휼함이 필요하다. 화평케 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할만한 조건들을 발견하여야 한다. 해서, 그들이 미운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픈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와 나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그로 더불어 화목할 수 있어야 한다.

한 강도가 어느 집에 들어갔다. 강도가 집주인에게 권총을 겨누며 ‘손을 들라’고 말한다. 강도의 말에 주인은 한쪽 손만을 든다. 강도는 ‘다른 쪽 손도 들라’고 강압적으로 말한다. 주인은 얼굴을 찡그리며 ‘오른 손에 신경통이 있어서 들 수 없는데요’라고 대답한다. 강도는 주인에게 “신경통이 있어요? 사실은 나도 신경통이 있는데...” 하고 그들은 밤을 새워서 그 신경통에 대하여 고통스러움과 치료방법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다. 한 사람은 죽일 수 있는 입장이고 다른 사람은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입장이었지만, 신경통이라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이 그들을 가깝게 묶은 것이다.

우리 교우들은 서로에게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많은 공통점이 있다. 우리 모두 예외 없이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의 짐으로 인하여 항상 마음이 무거웠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의 구속자가 되어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우리 인생항로에 선장이 되신다. 우리의 장차 가는 곳이 또한 한 방향--하나님나라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화평을 나누어주는 사람들이어야 할 것이다. 옆 사람이 지쳐있을 때, 신앙이 뭐 저 모양이냐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에게 팔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워줘야 할 것이다. 때로는 그를 부축하고 함께 길을 가줘야 할 것이다. 우리 교회에 이런 모습들이 있기를 바래본다.

약속의 자녀 이삭

약속의 자녀 이삭


성경구절: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2-23)


사람들은 한 번 약속한 것을 어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몇 번씩이나 다짐하였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정이 생기면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번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행하시는 분이시다. 약속을 언제 이행하실지 시기에 관하여 정한 바가 없기 때문에 참을성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 임의로 약속의 이행 때를 짐작해보다가 그때에 하나님의 약속이행이 없으면 실망하거나 포기하고 돌아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를 떠날 때, 또한 후에 하란에 머무르다가 그곳을 떠날 때, 세 가지로 그에게 약속을 주셨다. 땅의 약속, 민족의 약속, 복의 약속이 그것이다. 하란을 떠난 지 십 년쯤 되었어도 그에게 후사가 없어 아브라함은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확인시켜 주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지만 아브라함은 그의 정한 때에 후사가 없었기에 불만의 마음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아브라함은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하나님께서 밤하늘의 뭇 별들을 보여주시며 민족의 약속을 이행하실 것을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은 이를 믿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게 되었다(창 15:6).
그런 후 1-2년이 지나도 자녀가 생기지 않자 아브라함은 사라의 권유대로 하갈과 동침하고 그와의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얻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 육체를 따라 난 자녀이지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나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고 ‘사라의 몸에서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에게도 이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엎드리어 웃었다. 그리고 대답한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 17:18).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지만 20여 년이나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하매 약속 그 자체가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다. 약속을 주시되 8,000가지 이상의 많은 약속을 주십니다. 선거 때마다 정치인이 하는 많은 약속들은 거의 공약(空約)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많을지라도 반드시 이행되어지는 약속들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食言)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19)고 했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바라보고 얻기를 소망하되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약속들을 얻어야 할 것이다.

알지 못함을 아는 지혜

알지 못함을 아는 지혜


성경구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한 9:41)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Know thyself)”고 말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알지 못함을 모르고 행동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해서, 모르는 것을 더욱 열심히 배워 알고자 한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71장에,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은 뛰어난 것이다(知不知上).
     모르면서도 안다고 하는 것은 병이다(不知知病).
     병을 병으로 알 때만 병이 되지 않는다(夫唯病病, 是以不病).
     위대한 사람(聖人)은 병이 없다(聖人不病).
     병을 병으로 알기 때문에 병이 없다(以其病病, 是以不病)”라고 했다.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척하는 병”이 있다. 목사의 자질이 없으면서도 목사의 자질이 ‘있는 척’ 하고, 장로의 믿음이 없으면서도 믿음이 ‘있는 척’ 하고, 권사나 집사의 믿음의 교양이 없으면서도 ‘있는 척’ 하고 있다. “척하는 병”보다 더욱 큰 문제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목사와 장로를 포함하여) 믿음과 자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줄로 여기는 착각”이란 병이다.

목사가 된 사람은 자기에게 목사의 권위와 자질이 있는 줄로 알고 있고, 장로가 된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장로가 되었는지 돌아보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장로가 될만한 믿음과 자격이 충분히 있는 줄로 알고 있고, 집사가 된 사람은 사실은 될 사람이 없어서 어쩌다 자기 같은 사람도 된 줄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자기가 집사의 자격요건이 충분해서 된 줄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척하는 병”에 걸리지 않고 “착각의 병”에도 걸리지 않은 사람이라면, 직분에 상관없이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 잘 깨달아 알 것이고, 해서 쓸 데 없는 믿음의 자랑도 하지 않고 자신을 내세우는 일은 더 더욱이 하지 않을 터인데, 그 고질적인 “척하는 병”과 “착각의 병”을 갖고 있는 탓에 “나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목에 너무 힘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께서 가장 의로운 삶을 살고 있고 모세의 율법을 아는 지식과 행함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그들의 영적인 무지를 인정하면 차라리 그들의 허물과 무지가 사함 받을 수 있었을 터인데, 그들이 (영적으로) 보지 못하면서 본다고 하니 그들의 죄와 허물이 사함 받지 못한 채 여전히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의 신앙의 삶으로부터 “체하는 교만”과 “영적 무지의 결과인, 아는 줄로 여기는 착각”을 몰아내어야 할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온전하신 은혜와 축복이 우리 가운데 풍성하게 머물기를 바래본다.


코람데오(Coram Deo)

코람데오(Coram Deo)


성경구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갈 1:20)


바울은 그의 증거가 참됨을 말할 때 '하나님 앞에서'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라틴어로는 코람데오(Coram Deo)라고 하는데, 인터넷 서점의 이름으로, 어떤 교회에서는 청년회지의 이름으로 사용될 정도로 일반화되고 널리 통용되는 용어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진실되고 바른 삶을 살아야 할 것은 우리는 마음과 말과 행동과 삶으로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언정 무소부재하셔서 모든 세상과 우리의 마음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에 손을 얹고 서약을 하고도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세상이지만, 믿는 사람들은 늘 '하나님 앞에 선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셔서, 내가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는 등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 “이 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너희에게 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고 했고, 에베소서 3장 14-15절에서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했다. 또한 로마서 9장 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11장 31절에서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고 했고, 디모데전서 2장 7절에서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우심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고 말씀한다. 바울이 이렇게 여러 곳에서 참말을 말한다고 강조함은 그만큼 그의 세대가 거짓과 진리가 구별되지 않던 시대임을 웅변적으로 대변해 주는 것이다.

어떤 무명의 크리스천 시인은 진실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성도들에게 권면한다:
    “당신이 생각할 때나, 당신이 말할 때나, 당신이 읽을 때나, 당신이 쓸 때나,
   당신이 노래할 때나, 당신이 걸을 때나, 당신이 기쁨을 구할 때나,
   집 안에서와 밖에서 모든 잘못된 것들을 피하기 위하여
     항상 하나님의 눈동자 아래에 있는 듯이 그렇게 생활하십시오.”

우리가 현재 사는 이 세상은 거짓이 만연되어 있는 곳이다. 정직한 사람이 때로는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장소이다. 참말을 말하여도 참말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여느 사람들의 거짓말과 구별되지 않고 참말이 거짓말처럼 그렇게 가볍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이다.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까?
세상사람들이 나의 말의 진정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진실을 말함으로 인하여 나에게 불이익이 돌아오고 내가 비방거리가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의 모습으로 참말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항상 코람데오(Coram Deo)--'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서있는 자의 진실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스스로 귀한 것으로 여기는 자가 되며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의 진리가 더욱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진실 되게 전파되어질 것이다.


가르치는 즐거움

가르치는 즐거움


성경구절: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갈라디아서 6:6)

어느 날 석가모니가 영산(靈山)에서 중생(衆生)들에게 불교의 진리를 설파한다. 석가모니는 연꽃 한 송이를 들어 중생에게 보인다. 아무도 그 뜻을 몰라 잠자코 있는데, 오직 가섭 존자만이 그 뜻을 깨닫고 빙그레 미소짓는다. 석가모니는 가섭이 그 뜻을 참으로 깨달았는지 물을 필요가 없다. 깨달음은 설명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설명하고자 하면 오히려 그 진리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석가모니가 가섭 존자에게 말한다. “내게는 정법안장(政法眼藏: 올바른 진리를 갖추고 있음)과 열반묘심(涅槃妙心: 열반상태의 미묘한 마음)과 실상무상(實相無相: 변화하는 생멸의 세계를 떠난 진리)과 미묘법문(微妙法門: 진리로 가는 미묘한 길)이 있는데, 문자를 통해 표현치 않고 교리 밖에 별도로 전하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마하 가섭에게 부촉하노라.”
  가섭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뜻을 마음으로 이해한 것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이 유래되었고 또한 이 사건에서 ‘염화시중의 미소’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가섭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깨달은 것은 그의 천재성에서 기인한 까닭도 있었겠지만,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는 그의 마음의 원함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공자의 제자 중에서 뛰어난 제자의 수가 70명 정도 되었다고 한다. 그 중에 자공(子貢)은 재능(才能)이 뛰어났고, 안회(顔回)는 덕(德)과 학문(學問)이 뛰어났다.
논어 공야장(公冶長) 편에 보면 어느 날 공자가 자공에게 묻는다. “자네와 안회 중에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가?”
자공이 대답한다. “제가 어찌 안회와 비교될 수 있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지만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아는 데 불과합니다.”
공자가 말한다. “그렇다. 자네는 안회만 못하지. 나와 자네 모두 안회만 못하다네.”
공자가 그렇게 끔찍이 사랑한 안회는 그러나 애석하게도 41세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공자는 옹야(雍也) 편에서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그를 회상한다. “안회는 학문을 좋아했고, 화가 나도 다른 사람에게 감정을 옮기지 않았고, 잘못을 다시 반복하는 일이 없었건만 불행히도 명이 짧아 일찍 죽어 지금은 없으니, 그 외에는 학문을 좋아한다는 제자를 아직 듣지 못하노라.”

공자가 선생으로서 사랑하는 제자 안회를 잃었을 때의 슬픔이 컸던 것은 그만큼 안회가 공자의 학문을 배우기를 힘쓰며 선생인 공자를 따랐기 때문이다. 안회가 공자의 모든 제자 중에서 학문이 뛰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달리 학문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스승이었지만 스승보다 뛰어난 제자에 대해서 시샘하기보다는 그의 학문 사랑하는 모습을 보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다. 맹자(孟子)가 말하는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가운데도 ‘천하의 영재(英材)를 얻어 그를 훌륭한 인재로 만들어 내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제자로서 우리가 연구하는 학문은 바로 주님이다. 가섭이 불교의 깨달음에 우월하고, 안회가 유교의 학문에서 뛰어났던 것같이 우리도 그리스도교의 학문에서 뛰어날 수 있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 학문의 대상인 주님을 사랑으로 대할 때 가능하다. 세상의 학문은 머리로 깨달아 진보가 있지만, 주님을 아는 학문은 가슴으로 깨달아 진보에 이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목회자에게도 귀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지는 교인들이 있는데, 목회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자 힘쓰며 그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성도들이다. 선생으로서 목회자의 역할은 다른 학문이나 예·체능계의 선생들과 다르다. 다른 분야의 경우에 선생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 주장이나 학설 혹은 기풍을 승계하여 발전시키는 일이지만, 목회자가 바라는 것은 교인들이 자기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전해지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목회자로서 나는 나의 설교를 듣고 나와 함께 성경공부를 하는 교인들이 나보다 더 그리스도를 많이 사랑하고, 더 그리스도를 아는 데(경험하는 데) 뛰어나기를 소망한다. 그리할 때, 나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즐거움이 더하리라.

인생의 사계(四季)

 인생의 사계(四季)


성경구절: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塑性)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시록 22:1-2)


일년에 사계(四季)가 있듯이 우리 인생에도 계절이 있다. 봄이 있는가 하면 여름이 있고, 여름이 있는가 하면 가을이 있고, 가을이 있는가 하면 겨울이 온다. 어떤 분과 대화하는 가운데 인생의 계절(季節)을 생각게 하는 일이 있었다. 양로원(養老院)에서 노인들을 돌봐주는 일을 하고 계신 분이 “노인이 되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시는 분을 보면 저까지 낙담이 돼요. 저는 제 몸을 잘 추수릴 수 있을 때까지만 살고 싶어요” 하신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오직 하나님께 달린 것을... 더욱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삶의 계절을 주셨을진데, 우리의 처한 계절에 충실하고 그 계절의 의미를 생각하는 우리이어야 하리라.

일년의 사계(四季)와 같이 우리들은 인생(人生)에 유·소년기(幼·少年期), 청년기(靑年期), 장년기(壯年期)와 노년기(老年期)를 보낸다. 유·소년기(幼·少年期)에는 누구나 그 자신은 남들과 같은 경로를 밟아 결국은 죽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자신은 언제까지나 늙지않고 죽지않을 것처럼 생각한다. 자라기는 하되, 죽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공평(公平)의 하나님이시다. 나만이 인생의 사계(四季)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 여정(旅程)을 따라서 살게 하신다. 청년기(靑年期)에 있는 사람이 노년기(老年期)에 있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은 그도 얼마 후에는 그 길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봄, 여름, 가을과 겨울이 각각 그 나름대로 독특한 멋이 있어 지낼만하듯이 인생의 사계도 그 나름대로 독특한 멋이 있다. 다만, 일년의 겨울 다음에 봄이 오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확실(確實)한 것과는 달리, 인생의 겨울 다음에 만물이 생동(生動)하는 봄이 옴은 모든 사람에게 그리 확신 있게 보이지는 않고 소망 중에 기다려지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그러한들 우리 인생이 어찌하랴? 그것이 우리 육신의 죄(罪)로 인해 겪어야 할 과정(過程)인 것을.

육신은 비록 죄의 법으로 인해 늙고, 병들고, 죽으나, 우리의 영혼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주님의 낙원(樂園)에 들어갈 수 있음을 감사한다. 다른 사람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나로 인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겪게 하심을 감사할 수 있으면 좋으리라.

여름을 보내고 있는 청년으로서는 풍성하고 좋은 열매를 맺을 가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겨울을 보내는 분들은 인생의 겨울이 지나더라도 영원한 계절(季節)이 올 것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리라.
 
 

두발 자전거 타기

두발 자전거 타기


성경구절: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빌레몬 1:4-6)

성도의 신앙생활은 두 발 자전거(Two-Wheel Bike)를 타는 것과 같다. 두 발 자전거를 탈 때 페달(pedal) 밟는 일을 멈추면 자전거가 쓰러지듯이 성도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도들 가운데 믿음과 사랑의 교제하는 일을 멈추면 그 사람의 신앙은 정지하여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쓰러지고 만다. 그런데, 두 발 자전거 타는 사람은 금방 툭툭 털고 일어나서 페달을 밟으면 다시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지만, 기도와 믿음과 사랑의 교제라고 하는 페달 밟는 일을 중단하여서 쓰러진 사람은 다시 일어나서 그의 신앙의 두 발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 아니, 매우 어렵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다가 한 주일, 두 주일 거르다가 혹은 아예 몇 달, 일 년 이상을 쉬었던 사람이 다시 교회를 찾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는 경험해본 분들은 잘 알 것이다. 교회를 매주일 다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도 가운데 믿음과 사랑의 교제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이것을 처음 시작하는 일도 매우 힘들다. 그런데 이를 중단했다가 다시 재개함이 처음 시작하는 것 이상으로 힘든 것은 본인에게 왠지 쑥스럽고 가식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생활의 두 발 자전거의 페달 밟는 것을 노치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함이 필요하다.

믿는 사람의 믿음의 정진은 끊임없이 배우고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자세에서 가능하다. 나는 이만하면 됐지 하는 목회자나 성도에게는 신앙에 발전이 없다.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활모습에서나 짐승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 해서, 예수님은 “뱀의 (간교함은 빼고) 지혜와 비둘기의 순결함을 배우라”(마태 10:16)고 말씀하시고, “불의한 청지기의 (불의함이 아닌) 지혜롭게 셈하는 방법을 배우라”(누가 16:8)고 말씀하신다. 목회자나 평신도나 모두에게 신앙의 삶에 전진이 필요하다. 성경을 끊임없이 읽고 정기적으로 설교를 듣는 것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부족한 부분이 무엇이며 보다 성숙한 목회자나 성도가 되기 위하여 내게 필요한 것을 더하기 위함이다.

꿈을 간직하며 살아간 요셉

꿈을 간직하며 살아간 요셉


성경구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창세기 37:6-11)

“꿈이 있는 백성은 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 그 꿈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살아갈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의 꿈으로 인하여서 형제들의 시기와 핍박을 받았다. 결국에는 미디안 상인에게 팔려 애굽 왕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종이 되고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의 꿈을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다. 하기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신에 하나님께 그의 꿈을 이루어 달라고 간구하였을 것이고 그러한 그의 간구가 계속되는 한 그에게는 소망이 있었고 좌절하지 않았다. 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인자를 더하시고(창 39:21) 그와 함께 하셨다(창 39:23).

그가 꾼 꿈의 실현이 현실에 비춰보면 한참 멀어져 간 그 때에도 요셉은 그 꿈을 잃지 않고 간직하였기에 방자히 행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단정하게 행하였으며,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의 때가 이르매 요셉을 높이셔서 그의 꿈이 실현되어지게 하셨다.
형들은 그의 꿈이 실현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죽이고자 했고, 구덩이에 빠뜨리기도 했고, 미디안 상인에게 팔기도 하였지만, 환경을 다스리시며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가 요셉에게 주신 꿈을 결국에 성취되어지게 하신 것이다.
꿈을 간직하며 살아가던 요셉도 일이 잘 안 풀리고 그의 꿈이 점점 멀어져만 가는 것 같을 때 얼마간은 낙담하기도 하였을 테지만 주님으로 향한 소망의 끈을 계속 부여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의 꿈이 속히 이뤄지게 해달라’고 끊임없이 간구하였을 것이다. 해서,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얻게 되었을 때, 그는 그의 모든 어려운 과정들도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었음을 입술로 시인한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형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창 45:7-8).
 
우리에게 꿈이 있는가? 그 꿈이 이뤄지기 위하여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할 것이다. 그리할 때 우리에게 복 주시고 긍휼을 베푸시고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꿈이 온전히 이뤄질 것이다.
 
잠언 기자는 “묵시(또는 꿈이나 비전)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잠언 29:18)고 말씀한다. 우리에게 꿈과 소망이 있으므로 하나님 앞에 단정히 행하여야 할 것이며, 그 꿈의 성취를 위하여 하나님께 매일매일 나아와 기도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벧엘로 올라가자

벧엘로 올라가자


성경구절: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창 35:1)

흔히 화장실에 들어갈 때의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고 말한다. 큰 일이 닥칠 때는 급한 마음에 무엇이라도 할 것 같은데 볼 일을 다본 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서원하거나 약속한 것을 잊고 산다는 뜻이다. 그러다가, 큰 재난을 만나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가 잊고 살아가던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생각하고 허둥댄다.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약속의 말씀을 주시고, 야곱의 서원기도에 응답하여 주심으로 야곱의 이후의 일들은 (물론 약간의 어려움도 있었지만) 순조롭게 잘 풀려나갔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 머무는 20년 동안 고생한 것도 사실이지만, 레아와 라헬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베냐민은 아직 태어나기 전)과 많은 가축을 얻었다. 또 얍복 강가에서 밤이 새도록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축복을 받음으로 결국에 형 에서와도 화해를 하게 되었다(창 33장). 그에게 이제 부러울 것이 없어 보였다. 이에 그는 그가 벧엘에서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간구한 대로 그와 함께 하시고(창 28:15, 31:3), 그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고, 그로 하여금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는데,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약속 지킴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생각날 때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단을 쌓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그가 벧엘에서 한 서원을 지키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야곱과 그 일행이 세겜에 이르렀을 때, 그의 사랑하는 딸 디나가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세겜에 의하여 욕을 당한다(창 34장). 이것이 야곱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주었다. 야곱의 성급한 아들들이 하몰과 그 일가의 남자들을 죽이는 복수를 하였지만, 그 족속이 복수할까 두려워한다. 야곱은 이러한 화가 그에게 임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의 딸 디나가 철없이 이곳저곳 다니다가 화를 초래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슨 이유가 있단 말인가? 이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벧엘에서의 일을 생각나게 하신다.

창세기 35장 1절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고 하신다. 이에 비로소 야곱은 그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서원의 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해서, 그는 그의 가족과 기타 일행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창 35:3)고 말하고, 그들 중에 이제까지 간직하고 있었던 이방 신상들을 다 버리고 벧엘에 이르고 거기서 단을 쌓고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우리도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고 그에게 마땅히 드릴 경배와 찬양을 드리기 위해 벧엘(=신앙의 초심)로 올라가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믿음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믿음


성경구절: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전 2:15-16)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의 믿음”이다. 순종은 ‘믿음 이전의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8절에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그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지가 오래되었고 하란을 출발한 지도 십년이 더 지났는데 아직도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지 않음에 그의 마음에 원망이 생긴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밤하늘의 뭇 별들을 가리키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라고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은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다고 했다. 이에 창세기 15장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말씀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약속의 자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주저함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사라에게 이 일을 의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했다면, 사라의 성격상 그대로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고뇌와 고통이 없었겠는가? 아브라함이 이것이 하나님의 시험인 줄 알았겠는가? ‘나의 믿음이 어떤지 시험하시는 것일 뿐이야.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흉내만 내면 되는거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인가 중지시키실꺼야.’ 이런 계획된 짜임 속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겠는가?
아니다. 아브라함은 다만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으로 사흘 길을 행하여 모리아산에 이르고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기 위하여 그를 데리고 산을 오르고 있었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다른 것은 다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할 때 이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에서 우리는 순종하는 믿음의 결정체를 볼 수 있다. 창세기 22장 8절에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미리 가르쳐주신 대답도 아닌데 그의 순종이 그로 하여금 극한 감동을 주는 믿음의 대답을 하게 만들었다. 이는 또한 부활의 하나님을 증거하는 고백이기도 하다. 약속의 아들 이삭을 통하여 그의 후손이 하늘의 뭇별과도 같이, 바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의 자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명백한 상충(conflict)인데 아브라함은 이를 가지고 하나님께 따지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바보라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과 명령의 모순을 몰랐겠는가?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17-19절에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증언한다. 경수가 끊긴 그의 아내 사라의 나이 구십세와 그의 나이 백세에 약속의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지금 이 아들을 번제물로 취하신다고 하더라도 그의 언약을 이루실 분이심을 순종의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바람의 고백은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였다. 이 믿음의 고백이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시게 했겠는가? 얼마나 하나님을 감동시키셨겠는가? 요즈음도 이러한 고백을 우리가 할 수 있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로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창세기 22장 12절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극박한 목소리로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기쁘심과 만족하심이 이 말씀 가운데 가득히 담겨져 있다.

익명의 구제, 익명의 봉사, 익명의 헌물

익명의 구제, 익명의 봉사, 익명의 헌물


성경구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태 6:1-4)

얼마 전부터 교회 주보에 내던 헌금자 명단을 생략하였다. 몇몇 분이 주보에 헌금자 명단을 싣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목회자로서 개인적으로도 헌금자 명단을 빼는 것이 좋을 듯하여서 의논한 끝에 그리 한 것이다. 질문을 제기한 분들은 좋은 뜻으로 그리 하셨을 줄 믿는다. 헌금의 종류대로 이름이 열거되기에, 체면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내는 헌금이 아까워서, 혹은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헌금을 하지 않음이 부담스러워 ‘헌금자 명단을 주보에서 빼는 것이 좋지 않으냐’고 말씀한 분은 없을 줄 안다.
얼마 전에 어떤 큰 교회 주보에 실린 헌금자 명단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헌금을 한 주일학교 어린이들의 이름까지 깨알같이 작은 글자로 실려 있었다. 그 주보를 보면서, 헌금자 명단을 주보에서 빼기를 잘하였다고 생각했다. 어떤 목사님들은 ‘헌금자 이름을 주보에 실어주면 헌금이 늘어난다’고 말한다. 우리 교회의 주보에서 헌금자 명단을 뺀 이후에 헌금의 액수가 줄었는지, 아니면 오히려 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의 드리는 헌금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종교기관인 교회에 내는 것이 아니라 (물론 세금보고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나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전에 학원사역을 할 때, 참으로 열심으로 봉사하는 학생이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하는 헌신의 몇 배의 헌신으로 기독학생회(Korean Christian Fellowship)를 위해서 수고했으나,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노력하고 헌신한 것에 대해 언급하거나 감사하지 않으면, 전혀 딴 사람이 되어 한 구석에 물러나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교회의 일을 우리가 열심히 감당하고 나 자신을 헌신할 것은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남이 나를 인정해주고 칭찬하면 할수록 나는 하늘의 상급을 잃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1절). 그렇다면, 오히려 다른 사람이 나의 한 일에 대해서 칭찬해주지 않음이 좋지 않은가?!

우리의 구제나 봉사나 헌신이나 헌물은 남의 인정함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나?’ 체면치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넉넉하게 할 것이며, 나를 인정하시고 나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구제와 봉사와 헌신과 헌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의 왼손이 모르는 오른 손의 구제요 봉사이지만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은 아시고 기뻐하신다.

교회 안에서의 질서

교회 안에서의 질서


성경구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秩序)대로 하라.” (고전 14:33-40)

이민교회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모든 교파의 사람들이 한 데 모여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장로교회나 감리교회나 침례교회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교회 안에는 여러 다른 교파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다. 한 도시에 존재하는 한인교회의 수가 제한되어 있으므로 감리교회의 배경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그 도시에 존재하는 감리교회의 목사님이 마음에 들기가 그리 쉽지 않고, 장로교회의 배경을 가진 사람에게도 그 타운에 하나밖에 없는 장로교회 목사님의 설교가 마음에 맞기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파위주로 교회를 선택하기보다는 목사님을 보고, 혹은 주일학교 교육에 따라, 또는 사람들과의 이해관계에 따라 교회를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교회를 선택하여 다니기는 하지만 그 교회의 행정, 정책결정, 운영방식이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다. ‘내가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이런 일은 이렇게 결정했는데, 이 교회는 왜 저렇게 하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해서, 이의를 제기하게 되고, 하다가 목소리가 커지면 교회에 소요가 일게 되기도 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사람처럼 행동하라”(Do as the Romans do in Rome)는 말이 있다. 참으로 명언이다. 기왕에 미국에 살고 있으면, 미국문화 속의 불만스러운 것들과 한국문화 속에 극히 제한적으로 좋아하던 것들과 비교할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 살 때는 미국사람처럼 미국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미국사회 속에 있는 장점들을 보려고 해야 할 것이다.
장로교회를 다니기로 결정하였으면 장로교인처럼 행동하고, 감리교회에 다니기로 작정하였으면 감리교인처럼 행동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현재의 것과 과거의 것을 비교할 때, 과거의 것 중에 만족했던 사안과 현재의 것에 불만스러운 사안을 비교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부정적인 자세가 교회 내의 질서를 어지럽힐 수도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고전 14:33) 질서와 조화와 화평의 하나님이시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솜씨를 생각해본다. 우주의 수천 억이 넘는 항성들이 어떻게 운행하는지 살펴보자. 정교한 궤도를 따라 질서와 조화있게 운행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질서와 조화를 원하신다. 교회 내의 질서와 조화는 나를 주장하지 않고, 나의 감정과 왜곡된 생각에 따라 상대방을 판단함으로 오해하지 않고, 교우들을 이해하고자 하고 자신을 낮춤으로써 이뤄지는 것이리라.


Tuesday, April 10, 2012

모든 것의 때

모든 것의 때


성경구절: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전도서 3:1-8)

요즘 한창 선거의 일로 미국과 한국에서 정치인들이 바쁘다. 그들은 이번이 그들이 원하는 자리에 도전하기에 좋은 때인지 분주하게 계산해 본다. 의욕이나 욕심이 앞서다 보면,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은데도 출사표를 던지는 수가 있다. 어떤 사람은 한국축구의 열기를 기회 삼아 대권경쟁에 나서고, 어떤 사람은 심(沈) 모라는 여류 무속인이, "이번 대선에서는 해와 달을 성으로 가진 사람(明 씨)이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라."고 하였기에 대권에 도전하기도 한다 (본인은 반드시 그 이유 때문은 아니라고 하지만).

바둑을 두다 보면, 아직 대국의 초반인데도 불구하고 승리의 가망성이 없는 필패(必敗)의 판임을 알 때가 있다. 해서, 그 대국을 포기하기 위하여 돌을 던질 때를 찾으면서 한 수, 두 수 두지만, 어느덧 던질 때를 놓쳐버리고 무의미한 반상 메우기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을 보면, 초읽기에 몰리면서까지 끈기 있게 붙잡고 늘어짐으로 질 것 같은 바둑을 이기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관전자의 눈으로 보기에는 별로 불리한 것 같지 않은데도 40-50 수만에 돌을 던지는 경우도 본다. 그러나, 그가 분명히 고수(高手)임을 고려한다면, 그는 돌을 끝까지 붙잡고 늘어질 때와 돌을 던질 때를 잘 알고 그러한 결단을 내리는 것이리라.

크리스천으로서 나의 삶에 있어서 결단의 때는 어떻게 알 수 있나?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잣나무로 방주를 지을 것을 명하신다(창 6:14). 하나님께서 장차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인데 너와 네 가족은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신다. 방주를 지으라고는 하셨는데 언제 홍수를 내릴 것이니까 몇 년 안에 완성해야 한다고는 말씀하지 아니 하셨다. 아마 처음 방주 짓기를 시작하였을 때 노아에게는 이렇게 큰 방주를 지으려면 몇 년이나 걸릴 것인지 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방주를 짓되 100년의 세월을 걸려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치수의 방주'(창 6:15)를 완성하였다. 40일 밤낮으로 계속 내리던 비가 그치고 서서히 마른 땅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노아는 방주에서 언제 나가야 할 것인지 그 때를 헤아리기 시작한다. 백 오십 일이 경과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잠잠하시기만 하다. 이 백 일이 지났는데도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까마귀를 내 보내고, 또 비둘기를 날려보낸다. 비둘기가 감람 새 잎사귀를 물고 옴을 보고 땅에서 물이 줄어들었음을 알게 된다. 다시 비둘기를 내어놓으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땅이 말라 거할 자리가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잠잠하시기에 나가기가 주저된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으로 임하신 것은 그로부터도 한 두 달이 더 지난 다음인--즉 하늘의 창들을 여시고 비를 내리기 시작하신지 일 년하고도 십 일이 더 경과된 다음이었다(창 8:14). 하나님이 노아에게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과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창 8:15-17) 말씀하시매,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모든 육축과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다(창 8:18-19).

믿음으로 때를 기다리는 인내와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때를 아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너무 조급하여 때가 오기 전에 행동할 것도 아니요, 너무 태만하여 때가 왔는데도 그냥 지나쳐버릴 것이 아니다.“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秩序)대로 하라” (고전 14:33-40).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성경구절: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야고보 3:1)

어떤 목사님이 점점 유명해지거나 높이 올라가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님을 원숭이에 비유해서 말한 적이 있다. 원숭이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땅에서만 활동하고 나무 위로 올라가 뛰어다니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원숭이의 엉덩이가 빨간색인지 하얀색인지 잘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원숭이가 다른 동물들보다 높은 곳에 올라가 뛰어다니는 것을 즐기는 바람에 그 못생긴 엉덩이가 사람들과 다른 동물들 앞에 훤히 보여지는 것이다.

사람이 그저 낮은 자리에서 또는 평범한 지위에 있을 때는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적고 해서, 그의 치부가 드러나는 일이 거의 없는데, 국무총리, 장관, 혹은 대통령 후보가 되면 드러나지 않던 ‘원숭이 엉덩이’ 같은 치부(恥部)가 드러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들의 비리를 들춰내고 목청을 높여 비판하는 사람들 중 사실 상당수가 더 많은 비리와 더 더러운 치부를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일진대 이건 정말 아이러니(irony)라고 할 것이다.

작은 교회를 목회하는 무명의 목사는 교회 안에서는 그에 대한 신인도가 어떠할지 모르지만 대외적으로는 무난한 목사이다. 그러나 교회가 점점 커지면서 그의 이름이 나기 시작하고 잘 나가는 목사가 되면 시샘과 공격의 대상이 된다. 전에는 발견되지 않던 문제점들이 어찌 그다지도 많은지... 어떻게 그런 사람이 목사가 되었는지 모를 지경이다.
한참 잘 나가던 지미 스웨거트(Jimmy Swaggart)목사나 짐 베-커(Jim Bakker) 목사가 작은 목회를 하고 있었다면, 과연 그들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 있었을까? 물론, 목사에게 포르노나 여자 문제는 금물이지만, 그들이 작은 교회의 목사였다면 그들을 감시하는 눈도 적었을 것이요, 혹 그들의 비행이 발견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요란스럽게 비판을 받고 매장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주위에서 ‘그 목사가 이랬대, 저랬대...’ 하다가 사그라졌을 것이다. 그들이 목사가 아니었더라면, 물론 그들을 비난하는 목청은 더욱 적었을 것이지만.
한국교계를 대표하는 지도자라고 여겨지던 두 목사의 문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한 목사는 여성 신도들을 대한 그의 부적절한 행동이 문제가 되었고, 다른 한 목사는 박사학위 논문 표절이 문제가 되고 있다. 목회자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인가? 그들이 현 한국교계를 대표하고 있는 큰 교회의 목사가 아니었더라면, 교회 안에서 잠깐 논란이 되다가 시들해졌을지도 모를 일이 그들이 너무 높이 올라가있는 관계로 그들의 치부(恥部)가 많은 사람들 앞에 드러나고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듯하다.
해서, 예수님의 육적 형제 야고보는 우리들에게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야고보 3:1)고 역설적 권면을 하신 것이리라.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동이 참으로 중요하다. 이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 띄는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의 삶이 그들보다 나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더 문제 투성이라고 여겨지면, 믿는 사람은 그의 삶으로는 믿지 않는 사람을 평생 교회로 인도해 올 수가 없다.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는 것에서 지나서 직분자가 되면, 더욱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집사야??’ ‘저렇게 삶에 진실함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권사야??’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세상일에 악착같고 걱정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장로야??’ 하며 사람들은 뒤에서 혹은 대놓고 비난을 한다. 이는 비난하는 사람들의 믿음이나 삶이 비난의 대상이 된 집사나 권사나 장로나 목사의 삶보다 낫기 때문이 아니다. 그 직분자가 (믿음이나 삶에서) 그들의 눈높이 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의 믿음과 삶의 흠이나 실수가 그들의 눈에 보여지기 때문이다.

믿는 사람들, 특별히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자기의 믿음과 삶을 돌아봄이 필요하다. 첫째는, (전도의 대상인)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책잡힐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이며,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우리의 믿음을 견고히 하고 삶을 돌아봄이 매일의 신앙생활 가운데 있어야 할 것이다.
 
 

깨진 독에 물을 채우라

 깨진 독에 물을 채우라


성경구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

오래 전에 ‘달마야 놀자’라는 영화의 비디오를 빌려 본 적이 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자 불교계에서 지지하고 관람을 권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2000년 언제인가 한국에서 조폭(=조직폭력배)에 관한 영화가 정말 예상외로 흥행에 성공을 거뒀는데 (친구, 조폭 마누라 등등), 이 ‘달마야 놀자’라는 영화도 조폭을 주제로 하였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인데, 특이한 것은 야간업소나 유명무실한 건설회사나 유령회사가 아닌 산사(山寺)가 그 조폭영화의 촬영현장이라는 것이다.

조폭 간의 싸움에 패한 다섯 명의 폭력배들이 경찰들의 눈을 피해 산사로 들이닥치면서 그곳에서 스님들과의 갈등이 시작된다. 머물기를 강청하는 폭력배들의 거친 행동 때문이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로써 주지스님은 그들에게 일주일 머물 것을 허락하는데, 일주일이 지난 다음에도 폭력배들은 떠날 생각을 안하고(떠날 수 없는 이유가 발생하지만) 더 머물게 해달라고 막무가내로 졸라댄다. 해서, 그들을 못마땅히 여기는 스님들과 조폭 간에 내기를 벌이게 되고 내기에 지는 쪽이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약속한다. 부처님께 3천 배 올리기, 고스톱, 물 속에서 오래 견디기, 3-6-9 게임을 한 결과 승부는 2대 2로 조폭과 스님들이 팽팽하게 맞선다. 서로 떠나라 못 떠나겠다 티격태격할 때, 주지스님이 승부를 가름하는 문제를 낸다. 즉, 깨진 독 두 개를 사찰 마당에 준비하고, “깨진 독에 물을 채우라”고 지시한다. 신발 짝으로 깨진 부분을 막으려고 해보기도 하고, 사람의 배 위에 독을 뒤집어놓고 물을 채우려고 시도도 했지만 이 방법 저 방법이 다 여의치 않고 제한된 시간은 다 되어간다. 이때 갑자기 폭력배들의 우두머리(박신양 분)가 독을 들고 따라오라고 지시하고 그들을 데리고 간 곳은 물이 제법 고여있는 개울가이고, 그는 부하들에게 그곳에 독을 던지라고 소리친다. 그런 후에, 물로 뛰어들어서 독을 물 속으로 누르니 깨진 독에 물이 채워지고 또 넘쳐난다. 주지스님(김인문 분)은 이를 보며 “물이 철철 넘치는구나”라고 환한 미소를 짓는다. 바로 이것이 그의 선문(禪問)과도 같은 질문에 대한 모범 답이었던 것이다.

깡패들은 주지스님이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줌에 대한 보답의 뜻으로 법당 안을 청소하는데, 그러다가 부처상의 귀를 떨어뜨리고 만다. 말썽만 부리는 그들에게 화가 난 스님들은 이 일을 주지스님에게 고하면서 그들을 내보내지 않은 결과가 이것이라고 주지스님을 몰아세운다. 그러나, 주지스님은 법당의 부처의 상은 그저 상(icon)일뿐 그것이 ‘참 부처님’은 아니라고 설파한다. 부처님은 각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고 말한다.

얼마 후에 그 우두머리가 주지스님에게 ‘왜 우리에게 이렇게 잘 대해 주느냐?’ ‘스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착한 일을 하라든지 남을 괴롭히지 말라든지 바라시는 것이 있지 않느냐?’라고 묻는다. 이때 주지스님은 “그럼 너는 밑 빠진 독에 물을 퍼부을 때 어떤 생각으로 그것을 채웠어?”라고 질문하고, 우두머리는 “전 그냥 항아리를 물 속에 던졌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에, 주지스님은 “나도 밑 빠진 너희를 그냥 내 마음 속에 던졌을 뿐이야”라고 대답한다. 여기에 달마대사를 그 태두(泰斗)로 하는 선불교의 핵심 사상이 들어 있다. (이 선불교의 사상은 부처와 그리스도가 대체된 2세기 영지주의 기독교의 사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주지스님의 대답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부족한 모든 인생들에게 주시는 대답이기도 하다.

우리 ‘밑 빠진 독’과 같이 부족한 인생은 우리의 능력과 수고로는 물과 같은 성령을 우리 안에 가득 채울 수가 없다. 채운 것 같으면 어느새 우리의 내면 적인 죄의 속성으로 인하여 좌절하고 갈급해 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따름이다. 우리는 우리를 ‘그냥’ 하나님의 은혜의 강으로 던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강으로 풍덩 뛰어들 때 우리는 비로소 ‘밑 빠진 독과 같은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되는지’ 알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의 어떠한 노력과 금욕적인 삶도 우리의 죄와 허물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지 못하며, 우리는 여전히 곤고하며 매마른 심령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발견할 뿐이다. ‘밑 빠진 독’과 같은 우리에게 성령의 물을 가득 채우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지혜가 있기를 바래본다.
다윗은 시편 23편 5절에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넘쳐흐르는 주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을 했는데, 이것이 주님의 넘치는 은혜 속에 사는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마음의 눈을 밝히라

마음의 눈을 밝히라


성경구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1:17-19)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21-23절에서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눈은 ‘마음의 눈’이다. 이 눈이 탐욕스러우면, 우리의 몸도 탐욕으로 가득 차게 된다. 마음의 눈이 어둡고 병들어 있으면 육신의 몸도 병들게 된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밝으면 우리의 육신도, 영도 밝음을 체험한다.

신수라고 하는 중이 몸과 마음에 대하여 한 편의 시를 벽에 써놓았다.

        몸은 보리나무요, 마음은 그 앞에 서있는 밝은 거울과 같다.
        항상 거울을 깨끗이 닦아서 먼지가 그 위에 붙지 않게 하라.

부처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곧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항상 마음을 깨끗이 하는 수련을 계속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이를 본 혜능이 또 한 편의 시를 그 옆에 쓴다.

        예전부터 보리나무도 없었고 밝은 거울도 서있지 않았노라.
        본래부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니 어디에 먼지가 붙으리요?

신수는 정결한 마음을 갖기 위해 도를 닦는 것이 부처가 되는 깨달음의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혜능은 ‘무심(無心)’이 부처의 길이라고 대답한다. 선과 악을 생각하는 마음 자체를 없애는 것이 부처가 되는 길이라는 것이다.

선불교에서는 악을 생각하는 것이 제일 아래요, 선을 생각하는 것이 그 다음이요, 제일 위의 것, 곧 부처가 된 사람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를 위해 그들은 일생을 좌선하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깨달음의 경지에 스스로 도달할 수 있고 이때 시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하지만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 인간은 연약하여 결코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스스로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성령께 더욱 의지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마음이 아니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생각하는 선한 마음이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다. 이 눈은 영의 눈인데 성령께 온전히 의탁할 때 비로소 열릴 수 있다. 우리 마음의 눈은 신수가 말한대로 마음을 깨끗게 하고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우리 가운데 영접하며 그분께 나의 중심을 드리는 결단의 순간으로써 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아 알아서 더욱 믿음이 견고해지기를 원하신다.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성경구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브리서 11:1-2)

물질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있는데 비본질적인 외형을 구성하는 요소를 accident라고 하고 본질적인 실체를 구성하는 요소를 substance라고 한다. 그 물질을 그 물질처럼 보이게 하는 것--곧, 형태, 맛, 색깔과 냄새등은 accident이다.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성찬식 때 이 포도즙과 빵의 accident는 그대로 있지만, 실체 곧 substance는 변형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된다고 한다. 즉,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먹고 마시는 사람들은 비본질적인 외형--곧 허상으로서는 여전히 빵과 포도즙이지만 이를 먹고 마실 때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實狀)”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 실상을 영어성경은 substance(KJV) 혹은 assurance(RSV)라고 번역했다.

한 물질의 외형이 accident라고 했다. 이 외형은 비본질적인 요소이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이것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화를 내고 슬퍼하고 또는 즐거워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우연하게 혹은 돌발적으로(accidentally) 닥아오는 환경이나 고난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다만 비본질적인 요소일 뿐이다. 따라서 이것으로 인하여서 우리의 믿음이 시험을 받거나 넘어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비본질적인 환경과 조건 속에 내재하시는 우리 믿음의 본질, 본체이신 주님을 발견하여야 한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주님을 바라봄으로 각기 다른 환경 가운데서도 감사가 넘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에는 나의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 환경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원망을 발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다스리심을 이해하고 경험한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이라고 비본질적인 여건 가운데서도 본질적인 실재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감사와 기쁨을 돌려드린다.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가 그 대표적 예이다. 그는 유다나라가 갈대아인의 침공을 받고 예루살렘이 훼파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심히 두렵고 마음에 분함마저 생긴다. 유다가 하나님의 백성인데 설혹 약간의 악행과 불순종이 그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 아닌 더 악독한 갈대아인을 들어서 심판하실 것이라니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나? 하박국은 강한 불만과 분을 발하며 하나님께 항의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긍국적으로 악인에 대한 심판과 어려운 상황 가운데도 믿음을 지키는 의인에 대한 구원의 계획을 이해한 하박국은 하나님께 기쁨과 찬양을 돌린다. 하박국 3장 17-19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비본질적인 현상인 환경과 조건을 이기는 절정적인 믿음의 고백을 바울의 로마서 8장 35-39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우리의 실패와 부족이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하며,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우리를 고통스럽고 두렵게 하여 우리의 믿음을 없애고자 하며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하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다함 없는 본질적인 사랑에 대한 확신으로 여전히 감사와 즐거움이 넘쳐난다.


은혜받았습니다의 의미

‘은혜받았습니다’의 의미


성경구절: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딤후 4:3-4)

어떤 목사님이 자신의 경험을 말씀한다. 이 분이 큰 교회 전도사로 재임하던 중 모처럼 기회를 얻어 주일 저녁예배 설교를 맡게 되었다. 그 전도사님은 천 명이 넘는 교인들 앞에서 설교할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 말씀을 잘 전하기 위하여 열심히 설교준비를 했다. 고린도전서 8장을 갖고 크리스천의 경제윤리를 설교하고자 준비하는데 한 장로님의 얼굴이 자꾸만 설교준비의 길을 막는다. 그 장로님은 자그마치 빌딩 아홉 채를 소유하고 땅도 상당하여 당시 개인소득세 납부 실적이 한국 전체에서 10위안에 드는 분이었다.
그 전도사님은 처음에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제윤리를 말씀 그대로 설교하고 싶었지만 그 장로님이 부담이 되어 결국 우회적인, 변죽을 울리는 설교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속으로 이르기를, 그 장로님이 설교내용의 속뜻을 깨닫고 아홉 채 빌딩과 땅의 얼마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았다.
  설교를 마친 전도사님께 부자 장로님이 다가오며 말을 건넨다. “전도사님, 오늘 설교 참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아니 젊은 전도사님이 어떻게 설교를 그렇게 잘 하십니까?” 하면서 기쁜 낯으로 악수를 청한다. 그러나 기실 그분이 은혜 많이 받았다고 한 것은 전도사님을 통한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기 소유의 일부를 나누어줄 생각이 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설교를 듣고 보니, 장로님의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의 해석으로는 재산을 그대로 갖고 있는다고 해서 크게 죄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전도사님의 설교가 그분의 귀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 많은 재산을 계속 보유해도 좋다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에 은혜로 생각된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삶 가운데 부담으로 생각되는 것에 관해 설교 듣기를 원한다. 가려운 귀를 그대로 두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다. 누가 시원하게 긁어주기를 원한다. 전혀 언급이 없으면 그것을 갖고 사는 것이 계속 부담으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에 관한 설교를 듣고자 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보다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그것이 죄가 아니요, 허물이 아니라는 해석을 듣기 위해서이다.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아는 한 아이가 있다.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시는 것 같은데 야단치지 않으시면 계속 불안한 가운데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것에 관하여 “얘야, 그건 잘한 일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괜찮은 일이야.”라고 하시면 마음이 홀가분하다.
설교를 듣는 사람은 대개 자신이 가책을 받는 부분에 대해서 설교를 듣기 원하지만, 말씀을 통해 지적받기보다는 잘못된 것 같다고 여겨지는 부분에 대해서 괜찮다는 대답 듣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만일 목사님이 괜찮다고 말해 준다면, 설교를 통해 ‘은혜받았다’고 여기게 된다.

이 일에 대해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3-4절에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니라”라고 말씀한다. ‘귀가 가렵다’고 하는 표현은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잘못된 것처럼 여겨지는 부분이 자기 삶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 잘못된 부분을 도려내야 할 터인데, 그러자니 너무 아깝고 잃어버리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해 줄 설교자를 구하되, 그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둔다고 했다. 즉, 직언해 줄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듣기 좋은 소리를 해 줄 사람 두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하루는 부자 청년 관원이 예수님께 찾아왔다(마가 19:16-22; 막 10:17-22). 그 사람이 왜 예수님을 찾아왔겠는가? 그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계명들을 잘 지킨 사람이다. 그러나 그 마음에 여전히 한 가지 부담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에게 재산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그에게 늘 부담거리가 되던 중 영생에 관한 가르침을 전한다고 하는 예수라는 선생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리하여 예수를 만나서 그분의 변호를 듣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가 듣기를 원했던 대답은, “당신에게 재산이 많아도 괜찮습니다. 당신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계명들을 잘 지켜오지 않았습니까? 지금의 권세와 부귀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당신은 지금 이 모양 그대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는 대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참으로 직설적(直說的)이다. 그가 이것만은 피했으면 했던 문제를 적나라하게 지적하신다. 성경은 이것이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으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막 10:21). 그때 부자 청년 관원은 어떻게 했나?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 10:22)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나의 허물을 고치지 않아도 좋다는 말씀을 듣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지 않으신다. 만일 설교자가 ‘그래도 좋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 말씀의 강한 뜻을 변경하여 하와를 미혹한 옛뱀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구하지 않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만 구하는 자가 된다.

사람들의 죄와 허물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는 회개하지 않은--뉘우치고 고치지 않은--죄와 허물을 들추어내지 않고 덮어두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한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는 것이요 기억지 않으시는 것이다.

여자라는 이름

‘여자’라는 이름


성경구절: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1-15)

셰익스피어(Shakespeare, 1564-1616)의 희곡 햄릿(Hamlet)을 보면, “Frailty, thy name is woman! (약한 자여, 너의 이름은 여자로다!)” 하는 대사가 있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 그의 부왕이 죽은지 한 달도 채 못되어 모친 게투르드(Getrude)가 부왕을 독살한 그의 숙부 클라우디우스(Claudius) 품에 안기는 것을 보고 절망하여 외친 말이다. 여기서 ‘약한 자’로 번역된 frailty는 신체적 약함이라기 보다는 ‘유혹에 빠지기 쉽고, 도덕관이나 절개가 허약함’을 뜻하는 것이다.

사단의 대리자인 옛뱀이 먼저 이브에게 접근한 까닭도 여자가 남자보다 더 유혹에 빠지기 쉬웠던 까닭이었다. 남자는 먼저 흙을 취해서 만들어 모양에서는 덜 곱고 투박하지만 유혹에는 잘 넘어가지 않는데, 여자는 남자의 귀한 부분이요, 뼈중에 뼈인 갈비뼈로 만들어서 그 모양은 더 아름답고 섬세하지만 대신에 미혹에 넘어가기 쉬운 단점이 있었다. 하나님은 여자를 창조하시되 더 아름답고 좋은 작품으로 만드셨는데 여자는 선악과 한 개로 인하여 그 우위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우위성을 상실할 뿐 아니라 일생을 남자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도록 운명지어지게 되었다.

바울은 이러한 여자의 실수로 인한 지위의 격하에 대해서 디모데전서 2장 11-15절에서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한다.

하와와 아담의 타락 후에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내리신 징벌을 보면, 창세기 3장 16절에서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시고, 3:17에서 “아담(=남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두 절을 비교해보면, 여자에게 내려진 징벌이 남자에게 내려진 것보다 더 가중함을 알 수 있다.

범죄함 없이 여전히 에덴동산에 있었더라면 해산의 고통없이 다른 방법으로 아마도 하나님께 청하여서 원하는 만큼의 자식을 얻을 수 있었을터인데, 해산의 고통과 함께 자식을 낳게 되고 남편의 다스림을 받는 처지로 낮아졌다. 그리하여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쫓겨난 후 남자와 여자는 때로는 서로 미워하며 대립하는 관계가 되며, 때로는 그러면서도 서로 그리워하며 결합하기를 원하는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하나님의 그들을 향하신 뜻은 그러나 여전히 그들이 서로 도울 배필이요, 서로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창세기 2장 24절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고 말씀하는데 이는 육체적·정신적인 결합을 통하여 그들의 애정을 확인하는 것 이상의 커다란 창조의 섭리--주님과 하나되는 비밀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권투선수 에반더 홀리필드 이야기

투선수 에반더 홀리필드 이야기


성경구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3)

1996년 11월 9일에 에반더 홀리필드(Evander Holyfield)와 마이크 타이슨(Mike Tyson)간의 권투시합이 벌어졌는데 경기 전에는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던 것이 그 경기의 의외성(意外性)과 홀리휠드의 개인적 간증거리로 경기이후 한동안 젊은 사람들과 목회자들간에 이야기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경기가 열리기 전에 전문가(25-1)나 비전문가 할 것 없이 마이크 타이슨의 일방적인 승리를 예상했는데, 결과는 의외로 홀리휠드가 11회전에서 TKO승을 거두었다.
경기후 인터뷰를 하는데 홀리휠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뿐이었다. 경기후 “Jesus is Lord"라고 새겨진 모자를 쓴 홀리휠드는, “God is good! God is good!"을 연발하면서, “I give all my glory to God. With God on your side, you can do the things you choose to do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편에 계실 때, 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어떠한 일도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경기를 하러 나올 때도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란 구절이 적힌 옷을 입고 나왔다.

에반더 홀리휠드가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전향할 때는 꽤나 기대되는 건방진 유망주였지만 사람의 기대에는 못미치는 편이었다. 얼마 후에는 심장까지 나빠져서 권투선수로서의 삶을 마감해야할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던 그가 베니 힌(Benny Hinn) 목사를 만나게되고 베니 힌 목사의 안수를 받고 그의 심장이 나음을 얻었다고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병나음으로 인하여 그의 믿음이 확실하여지고 그는 그와 함께 하여주시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승리케하여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홀리휠드는 경기 전부터 이미 예정된 승리를 바라볼 수 있었고, 이미 승리가 예정된 경기를 함으로서 승리를 얻었다. 그래서 경기후에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찬양할 수 있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번 경기를 마이크 타이슨의 모슬렘과 에반더 홀리휠드의 기독교의 싸움이었고 결과는 기독교의 승리였다고 논평하기도 했다.

이 경기가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고등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어떤 고등학생을 둔 아버지는 예수 믿으라고 그렇게 오래 권해도 듣지 않던 아들이 홀리필드의 경기를 보고는 즉시 예수 믿기로 작정했다고 간증했다.

에반더 홀리휠드는 경기전부터 승리할 것을 미리 알았다고 했다. 우리 모두 그와같은 간증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예정된 과정(course)을 따라 살아가고 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결국은 승리로 끝날 것이다.

우리가 밤 하늘에 빛나는 별빛을 보는데, 우리가 지금 보는 별빛은 그 별을 떠난 지 몇만 광년, 혹은 몇십만 광년이 지난 것이다. 우리가 보는 그 빛은 이미 몇만 년 전 혹은 몇십만 년 전에  우리에게 보여지기로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천상의 전쟁(heavenly war: 12장)과 지상의 전쟁(earthly war)이 묘사되어있는데, 하나님께 대항한 사단의 세력은 이미 천상전쟁에서 패하여 내어쫓긴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전쟁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그 결국은 천상에서의 전쟁의 복사판이며 정해진 과정을 마치고 하나님의 군대의 승리로 끝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